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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i, je le savais : quand on parlait, je parlais de moi, et toi de toi. Alors que tu aurais dû parler de moi, et moi de toi."
이전에 본 누벨바그―<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히로시마, 내 사랑>, <400번의 구타>―는 취향에 맞건 맞지 않건 메시지를 건져낼 수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누벨바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는 무얼 건져올려야 할지 모르겠다. 이럴 땐 보통 영화제목에서 힌트를 찾는다. 우리나라에 <네 멋대로 해라>로 소개된 이 영화의 원제가 <À bout de souffle>로 '숨가쁘게'라는 의미다. 이 한 마디만 딱 들었을 때는 비틀거리며 절박하게 파리의 거리를 가로지르는 미셸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Michel: C'est vraiment dégueulasse.
Patricia: Qu'est-ce qu'il a dit?
Vital: Il a dit que vous êtes vraiment "une dégueulasse".
Patricia: Qu'est-ce que c'est "dégueulasse"?그밖에 떠오르는 인상(印象)이라면 묘하게 구세계와 신세계를 중첩시키고 있는 느낌이었다는 것. 유럽과 미국, 일간지 '프랑스 수아(France soir)'와 '헤럴드 트리뷴(Herald Tribune)', 파리지앵과 미국인, 낡은 시트로엥과 신식 미국차까지. 달리 말하면 장 뤽 고다르는 당시 영화산업을 주도하던 미국―또는 헐리웃 영화―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또 떠오르는 것은 미셸과 파트리샤의 어긋나는 대화와 시시껄렁한 말장난, 질투, 배회, 사랑의 피상적인 면(面).
Vivre ici et maintenant avant d'être à bout de souffle
구글링을 하다보니 이런 프랑스어 문구도 발견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기 전에 여기에 지금을 살아라. 너무 흔해서 그 의미마저 흩어져버린 카르페 디엠(Carpe diem)과 뜻이 다르지 않다. 지금 와 생각해보건대, 사실 영화의 몰입을 가장 받해했던 것은 종잡을 수 없는 미셸의 말이 심지어 불필요하게 폭력적인 느낌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미셸은 행동 면에서도 막된 면이 있다. 반면 파트리샤는 R 발음을 프랑스인처럼 하지 못하는 사랑스러운 미국여성이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뜻밖의 결단에서는 캐릭터를 다시 보게 된다. 그들의 관계는 결국 구토감을 유발하는 현기증 나는(dégueulasse) 것에 불과했단 말인가? 삶의 마지막을 역겨워하기에 앞서 선제적으로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의미인 건가?
아이튠즈에서 두 번을 렌트해서 본 영화다. 처음 영화를 튼 게 아마 프랑스 시험을 치기 이틀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온 뒤, 영화를 보며 대사를 최대한 따라가려고 애쓰다가 한 시간쯤 보다 영 난해해서 꺼버렸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즈음 지나서, 이제는 시험이 다 끝나고 남은 부분을 마저 보았다. 처음 볼 때보다는 좀 더 내용에 집중해서 봤지만 여전히 쉽지 않았다. 이런 시간상의 불연속성과 독특한 구성 때문인지 <네 멋대로 해라>는 좀 다른 의미로 각별한 영화다. 아무래도 장 뤽 고다르의 다른 작품을 좀 더 보든가, 해설이 실린 책을 찾아보든가 해야 할 것 같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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