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한 편의 스페인 영화일상/film 2020. 1. 25. 00:58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몇 초 동안 화면만 봐도 알 수 있다. 육감적으로 마블링된 패턴을 배경과 함께 포문을 여는 영화는, 뒤이어 코발트 빛 풀장의 수면 아래로 멍하니 눈을 뜬 채 부유浮遊하는 한 남자의 모습으로 연결된다. 마침내 수면 위로 고개를 젖힌 남자—살바도르(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시선은, 빨래터에서 물을 긷는 아낙네—꼬마 살바도르의 어머니(페넬로페 크루스)가 등장한다—들을 그리는 장면과 엮인다.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페넬로페 크루스라니 그저 반가울 따름이다. (페넬로페 크루스는 어느 순간에 나이듦이 멈춰버린 것 같다=_=)
대단히 자전적自傳的인 영화다. 그래서일까 처음에는 공감할 포인트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이 이야기가 자신의 삶을 그리고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서 깨달을 수 있었는데, 이를 깨달았을 즈음에는 어쩐지 자신의 과거를 담담하게 추적해나가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多崎つくるの巡礼>가 떠오르기도 했다. 시간의 중력 안에서 자신의 노쇠함에 완패 당한 유명 영화감독 살바도르 말로는 약—그것이 두통약이든 진통제든 혹은 헤로인이든—에 중독되어 무기력한 나날을 보낸다. 그는 간병인의 격려를 듣고 초창기 그의 성공작이었던 맛Sabor에서 인연을 맺었던 알베르토 크레스포—그러나 헤로인 복용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악연을 이어왔다—를 찾는다. 그리고 그는 그와의 만남 속에서 몇가지 기억의 조각들을 건져 올린다.
똑같이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이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싶다. 영화에서는 무수한 상징象徵들이 전진 배치되고, 시간의 이동 또한 훨씬 자유롭다. 지지고 볶는 일에도 지쳤던 살바도르가 알베르토를 통해 먼저 떠올렸던 것은 그의 유년 시절이다. 일명 '동굴'이라 불렸던, 하얗게 회반죽이 덧칠된 지하방—이곳은 오늘날의 발렌시아Valencia 지방이다—에서 살았던 살바도르 가족. 이 공간과 시간에는 살바도르 말로에게 애증愛憎이 스며들어 있다. 어린 시절 살바도르는 명민한 아이였지만 제대로된 정규교육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중에 소개되지만, 꼬마 살바도르는 이곳에서 에두아르도라는 화가와의 접촉 속에서 남성에 대한 에로틱한 호기심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이는 실제로 동성애자인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개인적 경험을 투영한 것일 테다.
Las noches en que coinciden varios dolores,
esas noches creo en Dios, y le rezo.
Los días en que padezco sólo un tipo de dolor, soy ateo.
살바도르 말로는 어쩐 일로 알베르토 크레스포에게 호의의 표시로 <중독Adicción>이라는 연극 시나리오를 건넨다. 그에게 마드리드라는 도시는 현재 정착해 있는 곳인 동시에 아픔이 짙게 베인 공간이기도 하다. 연인 페데리코와의 사랑이 펼쳐진 배경무대이지만, 사랑 끝에 찾아온 이별을 감내해야만 했던 질식할 것 같았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 이 도시의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고 있고, 이 때의 추억을 목탄木炭 삼아 재빠르게 각본을 스케치한다. 이리하여 알베르토 크레스포를 독백 무대에 올린다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발상은 참 멋지고, 개인적으로 꼽는 명장면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거쳤던 격정적인 감정과 이후에 찾아온 씁쓸한 뒷맛. 물론 이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베르토는 유달리 눈물을 머금고 연극을 관람하는 한 인물(페데리코)와 조우遭遇한다.
사랑은 당신이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지
그는 바로 <중독>에서 마르셀로로 소개되는 살바도르의 옛 연인이다. 지금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정착한 그는 알베르토의 연기를 보면서 단번에 자신의 이야기임을 직감한다. 그렇게 뜻밖에 재회하게 된 머리 희끗한 중년의 두 남성은 행복하면서도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을 회상한다. 이제 와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걸 잘 아는 두 사람은, 북받치는 옛 감정을 뒤로 한 채 아주 짧은 만남으로 서로에 대한 추억을 꼭 여민다. 편집된 화면 없이 영화에 등장한 그대로 짧은 만남이 끝난 것이라고 한다면 어쩐지 서글프기까지 하다. 여하간 그렇게 살바도르는 그때까지 의존해왔던 헤로인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게 된다.
살바도르가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거슬러 올라간 뒤 다다르는 종착역은 어머니에 관한 기억이다. 시종 영화에는 살바도르의 엄마 하신타Jacinta가 등장한다. 현실적이고 억척스러운 그녀는 아들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분투했지만, 꼬마 살바도르의 성공을 향한 욕망을 완전히 해갈解渴해주지는 못한다. 장성한 아들은 어머니를 홀로 두고 마드리드로 상경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늘 자신의 그늘이 되어주었던 하신타에게 부채의식을 느낀다. 과거로의 지난한 여정을 마친 하나의 각본을 써낸다. <첫 번째 욕망El primer deseo>. 이제 새로운 컷cut이 들어간다. 엄마, 이 동네에 영화관이 있을까요? ...글쎄, 아들아, 잠잘 집이나 좀 있었으면 좋겠구나. 오늘의 알모도바르는 꿈같은 과거 위에 서 있고, 과거는 곧 오늘의 연장된 수평선이다.
+사족) 사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작품은 2006년 <귀향> 이후부터는 좀처럼 특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에게>, <욕망의 낮과 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인데, 이후로 그만이 가진 참신함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지면서 예술가가 겪는 부침浮沈이란 게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의 작품은 회고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이 많지만, 이번에는 작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오롯이 녹여냄으로써 페드로 알모도바르라는 사람의 새로운 일면을 여실히 보여준 것 같아서 좋았다:)
'일상 >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가냘픈 날갯짓 (0) 2020.02.07 권력을 쥔 순응자 (0) 2020.02.06 이탈리아 영화 두 편 : 두꺼비와 어느 영웅 (0) 2020.01.24 프랑스 영화 두 편 : 얼룩말과 페르소나 (0) 2020.01.23 자켓과 부츠와 바지와 장갑과 모자 (0) 2020.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