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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켓과 부츠와 바지와 장갑과 모자일상/film 2020. 1. 17. 13:08
새해 첫 픽은 <디어스킨le daim>이다. 영상화면에 비친 장 뒤자르댕Jean Dujardin의 매력적인 미소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화제목 때문에, 일찍부터 꼭 봐야겠다고 마음먹던 영화였는데 상영관도 많지 않고 그마저도 시간이 맞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 얼마 전 작심하고 영화를 관람했다.
장르도 모르면서 프랑스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봤는데, 크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압도하는 영화다. 이와 비슷한 프랑스 영화로는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미세스 하이드>와, 마찬가지로 기괴스럽기 짝이 없는 줄리아 듀코나우 감독의 <로우Raw>가 떠오른다. 그래도 <로우>만큼 살벌한 영화는 아니고, <미세스 하이드> 정도의 달콤살벌(?)한 무드가 이어진다. 또한 장총을 메어 들고 겨울숲으로 사냥을 떠나던 어느 프랑스 영화―삽입곡이었던 Fleetwood Mac의 <Men of the World>가 무척 잘 어울렸다―의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감독은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에 대한 평론조차 찾아보기가 어렵다. 조르주(장 뒤자르댕)가 찍던 것이 모큐멘터리mockumentary든, 영화감독을 자처하는 그가 히치콕이 <펄프 픽션Pulp Fiction>을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한 가지만 건져가자. 이 영화에서 사슴가죽deerskin이란 무엇인가? 그가 수중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가면서까지 구한 사슴가죽, 돈이 쪼들리는 상황에서도 팔지 않고 끝까지 사수했던 이 사슴가죽은 무엇일까? 자켓에서 시작한 그의 취향은 뒤이어 바지, 장화, 장갑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그에게는 그를 지탱해줄 허물 또는 껍질 같은 것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장소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아내에게 버림받는다. (이마저도 구체적으로 사연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자동차를 이끌고 이 지점 저 지점으로 옮겨다니지만―그러면서 우스꽝스러운 영상을 찍고 여기에 드니즈를 동참시킨다―조르주는 철저히 고립되게 활동한다. 덧붙여 이 세상에 자켓을 입은 유일한 사람이 되기 위해,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영화를 촬영한다는 것을 미끼로 점퍼를 탈취(?)한다. 그 방식이 허무한데, 그저 자켓을 벗어 차의 짐칸 트렁크에 넣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뿐이다.
조르주는 사슴가죽 자켓에게 말을 걸고, 사슴가죽 자켓은 조르주에게 말을 건다. 사슴가죽 자켓은 곧 그의 정체성이다. 그는 바로 그 자켓을 필요로 한다. 아니 모자라다. 사슴가죽으로 된 바지도 있었으면 좋겠고, 기왕이면 부츠도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다, 사슴가죽으로 된 장갑까지. 일반적인 사람이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을 할 때 위화감이 들지만, 또 실제로 그런 어리석은 행동 하나하나가 어설프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 역시 나란 사람을 꽁꽁 싸매기 위해 외투나 갑옷 같은 걸 걸치려 애쓰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삶에서 그런 근본적인 불안감에 시달려본 적이 있을 것이다. 타인에게 의지하지도 못해 다른 무언가에 매달려야 했을 때 조르주는 사슴가죽을 택했을 뿐이다. 여러 역할을 요구받는 현대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그저 지나가는 남이야기가 아닌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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