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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多情)하거나 무정(無情)하거나 또는 비정(非情)하거나일상/film 2019. 12. 30. 20:46
대단히 사랑스러운 영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은 대략 일곱 여덟 편의 영화를 봤지만, 그간 이런저런 영화를 봐도 <아무도 모른다>를 뛰어넘는 작품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고등학교 때 봤던 <아무도 모른다>의 잔상이 강렬해서였을 것이다. 그래도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부단히 다루는 '가족'이라는 소재 안에서 조금은 다른 느낌의 무게감을 안겨줬던 것이 <엔딩노트>라 할 수 있는데,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리고 있는 이 작품은 임종을 앞둔 노년 남성의 에세이(essaie)를 그리고 있어서 절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고, 가벼운 쇼크마저 받았었다.
국가간의 물적교류가 단절이 되어도 문화적 교류까지 끊겨서는 안 된다고는 하지만, 요새 일본영화들이 국내에서 거두고 있는 실적이 신통치 않은 듯하다. 흥행성 여부를 떠나서 예전에는 주목을 받았던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도 크게 회자되지 않았고, 이번 <파비안느를 위한 진실>도 국내 팬이 많다고 알려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임에도 반응이 그저 그런 듯하다. (가족영화임에도) 전혀 가족영화 같지 않은 타이틀을 달고 있는 데다, 프랑스 배우들이 등장한다는 생소함 때문일까...
아무리 세계화가 진행되었다고 하지만—물론 나는 이 말에 회의적이다—국가간의 관계라는 게 참 미묘한 것이, 국소적인 수출규제로 인해 한 국민의 정서 전체가 한 순간에 돌변하기도 한다. (전략적으로 일부 수출물자를 공략했다는 것이 사실 괘씸하고, 명목상 위안부 합의 판결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면서 북한에 수출규제 품목을 교역했다고 명분을 갖다붙이는 것이 더 괘씸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규제를 순차적으로 거두어들인다 해서, 이미 돌아선 마음이 똑같은 속도로 회복될 리 없다. 아주 최근에 야후재팬의 메인기사를 열어 봤는데, <한국 젊은이들의 복잡한 속내>라고 제목을 단 글에서 일본 여행을 다녀와도 SNS에 올리지 못하는 고충, 양질의 일본제품을 쓰지 못한는 데서 오는 불편함, 끝으로 '아니메(アニメ)'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렬한 호응 등등을 단박에 얼버무리며 아전인수 격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자극적으로 오도(誤導)하는 걸 보며..그리고 그 밑에 달린 대단히 냉소적이고 자극적인 댓글들을 보며...다시 한 번 뉴스를 끊어야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언론이 언론의 '전문성'을 상실한 건 반도나 열도나 똑같은 것 같다.
갑자기 이야기가 너무 샜는데, 어쨌든 나는 이 영화가 순수(?) 프랑스 영화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게다가 줄리엣 비노쉬와 에단 호크라니'a'...이건 무조건 보는 거다 하고 검색을 해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엔딩크레딧을 보면 스태프의 90% 이상 프랑스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잘은 몰라도 프랑스 영화산업과 일본 감독을 매개해주는 에이전시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이 됐을까 좀 궁금했다. 여하간 요즈음 순도 100% Made in ×××인 것이 얼마나 되랴~ 요새 의식적으로 일본제품을 안 사기는 하지만, 일본기업에서 만든 완제품을 안 쓰는 것이지, 들여다보면 부품으로든 유통망으로든 나는 이미 몇 차례 일본의 손을 거친 물건과 서비스를 누리고 있을 것이다. 여하간 각설하고 이 프랑스 영화의 어느 구석에 자포니크(Japonique)한 장면이 스며들어 있지는 않을까 문가에서 기웃거리는 아이처럼 이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의 제목(la vérité)처럼 이 영화는 진실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명료한 진실이 아닌 가려진 진실, 그리고 진실을 가장한 거짓에 대해 다루는데, 이 모든 스토리는 여배우로서의 성공가도를 달리기 위해 가정을 철저히 도외시 했던 파비안느라는 여배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딸 뤼미르가 그토록 파헤치고자 하는 진실은 곧 '사라'라는 미지의 여인으로 스토리가 이어지는데, 파비안느의 과거 동료 여배우 정도로 소개되는 이 인물(사라)은 파비안느가 자신의 나약함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 같은 존재이자, 파비안느가 자신의 무력감을 무효화시키려고 마음 먹었을 때 파멸시켜야 할 대상이 된다. 사라라는 인물은 영화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대신 '마농'이라는 신예배우를 '사라'에 치환시켜 대응시킴으로써 파비안느는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게 된다. 그리고 내면에 억눌러 두었던 진실이 틈을 비집고 열리는 순간, 가족간의 불화와 갈등도 해빙(解氷)을 맞이한다.
나는 배우라서 진실을 말하지 않아. 진실만 말하는 건 재미 없잖니.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집요하게 엄마의 가식(假飾)을 들춰내고 바로잡으려고 하는 딸 뤼미르(줄리엣 비노쉬)보다도 사실 더 눈에 들어오는 건, 어쩐지 뤼미르의 남편이자 파비안느의 사위인 행크(에단 호크)다. 백치미(?)마저 느껴지는 이 캐릭터는—에단 호크라는 배우 자체가 천진한 장난기가 매력이다—모녀간의 다툼과 질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신을 폄하하는 장모의 말에 잠시 떨떠름해 하다가 이내 장모와 와인잔을 부딪히며 금새 기분을 푼다. 영화에서 남성들은 주변적으로 등장할 뿐이다. 집안의 집사도, 파비안느의 옛 남편도, 지금의 남편도 모두 결정적인 역할을 맡지 않는다. 극을 주도적을 이끌어 가는 것은 파비안느, 사라, 마농 이 세 사람이다. 전통적인 젠더의 역할을 뒤바꿔 놨지만, 그 사실이 거북하다기보다는 여성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화해의 무드', '다정다감함', '친밀감의 제스쳐'가 남성들을 통해 이뤄지는 젠더의 도치(倒置) 방식이 오히려 재미있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후 아주 오랜만에 본 켄 로치 감독의 영화다. (워낙 감명깊게 봐서 부모님에게도 적극 권해드렸고, 크리스마스에 이 영화를 보시고선 무척 좋아하셨다.) 켄 로치 감독의 작품은 <하층민들(Riff-Raff)>로 처음 접했는데, 영미식 신자유주의가 빚어내는 비극을 사실적으로 담담하게 서술하는 (그리고 고발하는) 그이 표현방식이 참 좋다. (참고로 영화 <하층민들>은 신자유주의를 표방했던 대처리즘이 대두된 시기에 영국사회에서 열악한 근로환경에 놓였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물론 미국에서도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폐해를 다루는 영화는 많지만, <빅 쇼트>처럼 처벌받지 않는 자본가 또는 금융인들의 탐욕과 이기심을 익살스럽게 고발하는 데 초점을 맞춘 영화가 많다. 반면 켄 로치가 그리는 폭주하는 자본주의 속 영국에서는 고용의 불안정성, 노동법 위배, 물가상승을 따라가지 못하는 소득수준을 다루는데, 이 모든 것은 대개 막강한 소수(자본가나 금융인)보다 힘없는 다수(근로자와 일반가정)를 그림으로써 직조(織造)된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시스템이나 작동방식은 천태만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자유주의'니 '자본주의'니 '자유시장경제'니 하는 것은 이상적인 개념에 가까울 뿐이고 잘 다듬어지고 도식화된 '스토리'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다만 사회에 추동력을 가져다주는 모멘텀이라는 것은 반드시 존재하고, 이때 '자본'과 '자본의 순환'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통용되는 상식이다. 하지만 '자본'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안전망이 심각하게 훼손된다면 어떡해야 할까.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우리의 신체와 물리적으로 분리된 '자본'이라는 도구를 활용하기로 마음먹은 상황에서—즉 도구라는 것은 때로 완전히 통제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가정할 때, 어느 지점부터 주객(主客)이 전도되고 인간이 소외된다고 볼 수 있을까. 이는 사회적 맥락마다 합의 지점이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 영화 안에서 한 가정이 처한 현실은 분명 그들이 자처한 시장의 작동방식이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리키에게 벌점을 매기고 사납금을 내라고 다그치는 상사의 위치도 이해가 된다. 이들의 생태계 안에서는 그의 방식이야말로 적자생존방식이므로. 하지만 이해(理解)를 하는 것과 수용(受容)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병원 대기실에서 리키의 아내 애비가 상사에게 언성을 높이는 장면은, 이들이 감내할 수 있는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켄 로치가 의도하듯, 모든 것은 세련스럽다. 휴가제도가 있고, 법정근로시간이 있고, 교육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것을 결코 향유하지는 못한다. 세련스럽기에 더욱 가공(可恐)할 만하다.
우리는 절대적 빈곤에 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동정심을 퍼부으면서도, 정작 영화 속 인물들이 겪는 부조리함에 대해서는 섣불리 입장을 정하지 못한다. 실제로 이들이 겪는 상황이 이분법적으로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가령 영화 속에서 리키는 무선장비를 이용해 손쉽게 배송을 처리하지만, 늘 위치추적에 노출되어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는 국가에서 마련한 사회보장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잡하고 까다로운 행정절차 때문에 끝내 주인공이 극단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이처럼 양가성(兩價性)을 지니는 물질문명의 발달 속에서 어떤 것에 가치를 둬야 하는지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다.
미국에서도 조합에서 정부에 이처럼 알력을 행사한 역사가 있었다는 게 신선하다. 영화는 케네디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의 재임시절에 미국에서 전개되었던 마피아의 암투를 다루고 있으며 실화(實話)에 기반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처럼 해학 섞인 스릴러물도 아니고, <대부>의 마초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는 영화를 그리 찾아보는 편은 아니지만, 여러 매체에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어서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관에 들러서 보았다. 현재와 과거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엮여 있고, 과거와 현재가 수렴(收斂)하는 종반부에서 시간의 무상함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보다 더 시선을 사로 잡는 것은 프랭크 시런이라는 평범한 시민이 조직 안에서 킬러로 진화해가는 과정이다.
프랭크 시런은 정육점에서 물건을 떼어 유통하는 일을 하고 있는 평범한 시민으로, 러셀이라는 인물을 만난 것을 계기로 마피아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평범한 개인이 조직 안에서 어떻게 악을 저지르게 되는지 지적하는 것과 같이, 프랭크 시런이 수행하는 악(惡)은 무서울 정도로 일상적이고, 조직의 우두머리인 러셀로부터 하달된 명령 앞에서 일체의 비판의식은 말끔히 소거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딸의 집을 찾은 프랭크는 이 모든 것이 다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였다고 말하지만, 딸은 감정에 북받쳐 대답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프랭크의 복수가 두려워 지켜달라는 한 마디 말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고.
조합의 위원장인 호파(알 파치노)가 마피아를 동원하는 것도 이야기의 굵은 갈래를 이루는데, 사실 영화 속에 그려지는 것처럼 위원장으로 선출되기 위해 유세 현장을 뛰어다니고 정부에 로비를 하는 모습이 (친기업적인 이미지가 강한 미국사회를 생각해보면) 꽤 신기했다. 위에 어느 노동자의 비애(悲哀)를 그린 켄 로치의 영화도 나와서 그런데, 참고로 통계를 찾아보니 한국, 미국, 영국의 노조가입률은 각각 10%, 11%, 25%라고 한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파업으로 시끄러웠던 프랑스가 11% 수준) 단, 프랑스의 경우 노조가입률은 낮은 편이어도 단체협상 효력 확장 제도를 통해 비노조원을 포함한 90% 이상의 근로자들이 동등하게 협상의 효력을 인정받는다고 하니, 단지 노조가입률만으로 노동환경을 유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가령 영국의 경우 단체협상 적용률은 노조가입률과 비슷한 26%에 불과하다니 조합에 반드시 가입을 해야만 협상의 혜택을 누린다고 할 수 있다)
각설하고 불현듯 들었던 생각은—생각이 이리저리 튄다=_=;;—미국의 근로환경에 관한 궁금증이 든다. 이른바 FAANG(Facebook, Amazon, Apple, Netflix, Google)이라 일컬어지는 공룡기업을 일궈낸 미국에서, 얼마전 뉴욕에 제2본사를 세우려던 구글의 야심찬 계획은 소상공인의 몰락을 우려한 시민들의 반발로 좌초되었다. 또한 미국경제가 호황기를 구가하면서 FANNG의 고용창출 효과가 대단하다는 분석이 나왔지만, 동시에 창출된 일자리의 대다수가 단순일용직이라는 지적이 뒤따랐다. 글쎄..'노동권', '조합' 등의 법적·사회적 개념 틀을 떠나서, 앞으로 '인간의 노동'은 어떤 가치를 지니게 될까. <멋진 신세계>처럼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것인가, 로봇이 끼어들지 못하는 영역에서 제한된 일자리를 두고 아귀다툼을 벌이게 될 것인가, 아니면 부품의 부품의 부품으로 점점 더 소립자가 되어갈 것인가. 3시간 반짜리 범죄물을 보며 엉뚱한 질문들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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