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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영화 두 편 : 얼룩말과 페르소나일상/film 2020. 1. 23. 02:55
모처럼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를 봤다. 영화 <신의 은총으로>는 아동성추행을 지속해온 어느 사제에 대한 고발을 다루는 이야기로, 호평 가운데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다. 영화를 보게 된 것―개인적으로 종교적인 색채가 가미된 영화를 좋아하진 않는다―도 그런 높은 평가의 영향이 크다. 관능미 넘치는 영화를 줄곧 제작해왔던 프랑수아 오종이 픽션에 기반한 사회고발적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도 관심을 끌었지만 말이다……
앞서 말한 영화의 소재―아동성추행을 지속해온 사제와 이를 묵인해온 카톨릭 교계―는 미국영화 <스포트라이트>를 떠올리게 하는데, 접근 방식은 두 영화가 정반대이다. <스포트라이트>는 교단의 폐부를 파헤치기 위해 기자들이 문제를 발굴하고 이슈화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신의 은총으로>에서는 피해자들이 직접 발벗고 나서서 범행을 저질러왔던 한 사제의 허물을 낱낱이 고발한다. 도식화해보자면 하나는 탑다운(Top-down) 방식으로, 후자는 바텀업(Bottom-up) 방식으로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러한 연출목적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영화의 무대배경이 매우 다르다는 점이 서로 다른 접근법을 낳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미국사회 전체가 그렇기도 하지만 <스포트라이트>의 주무대인 보스턴은 가톨릭의 교세가 그리 크지 않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이 더욱 눈에 띄지 않고, 문제제기에도 소극적이다. 반면 프랑스 사회는 가톨릭교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신의 은총으로>의 주무대인 리옹에서는 피해자들의 행동이 보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이다. 하지만 또 거꾸로 생각을 해보면, 프랑스 안에서 가톨릭이 지니는 권위가 공고하다보니, 그러한 체제에 도전한다는 것이 더욱 쉽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피해아동들의 부모세대만 해도 종교인의 범죄를 외부에 알리는 것에 무척 주저한다—도 드는데, 여하간 다소 왈가닥(?)스러운 프랑스인들답게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상황을 풀어나간다.
영화에는 세 명의 남자 주인공―모두 유년시절 프레나 신부의 피해자들이다―이 등장한다. 알렉상드르, 프랑수아, 에마뉘엘(자신을 사회부적응자로 성장한 '얼룩말'이라 지칭한다)이 그들이다. 종교적 믿음에 회의를 느끼고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프랑수아 같은 인물이 있는가 하면, 아픈 경험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에 의지함으로써 극복해나가는 알렉상드르 같은 인물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수아는 환속(還俗)―세례를 무효화하는 것―까지도 서슴지 않는 반면, 알렉상드르는 어떠한 체제를 비판하고 싶다면 그 체제(가톨릭) 안에서 저항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피해경험에 대해 동일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반응이 캐릭터마다 다르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동성애자로 그려지는 프레나 신부는 명백한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다. 자신의 도착적인 행동에 문제를 자각한 프레나 신부는 교단에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고(告)하지만, 교단내의 허물을 자인할 수 없었던 바티칸을 위시한 카톨릭 조직은 사건을 쉬쉬 은폐하다가 환부(患部)를 도려내야 할 시점을 놓치고 만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조직의 비호(庇護) 아래 가해자가 진화를 거듭하는 끔찍한 성장일지이기도 하다. 바르바랭 대주교가 '신의 은총으로(grâce à dieu)' 공소시효에서 벗어났다고 표현했던 것은, 정작 그들이 돌보아야 할 교인들에게는 전혀 다행스럽지(heureusement) 않은 안이한 사고방식이었다. 이처럼 신앙을 볼모로 자정(自淨)을 포기한 조직은 더 이상 신앙의 문제가 아닌 체제(Acien régime)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의 후반부에 알렉상드르의 아내가 에마뉘엘에게 급작스럽게 털어놓은 피해경험을 지켜보며 실로 우리 사회에서 약자가 겪는 성폭력이 그리 드물지 않겠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때때로 (실은 '자주'인 것 같지만..=_=) 일이 뜻대로 안 될 때가 있는 법이다. 하루는 학교에 갈 일이 있어 눈칫밥 먹어가며 어렵사리 오후 반차를 냈는데, 약속된 만남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일이 잘 안 풀렸다. 생각할 수록 나 자신이 너무 안이했다는 자책감이 들었고, 그런 까닭으로 쌓였던 스트레스에 스트레스 한 덩어리가 더 얹혀졌기에.. 사고(思考)하는 것도 지친 나머지 영화관에서 영화를 세 편 휘이~ 몰아봤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가장 마지막에 멍—한 상태로 본 영화인데, 정말로 대단했다. 인문학자 강신주 씨가 왜 이 영화를 '감독이 관객에게 꺼내보이기 싫었을 것 같다'고 말했는지 200% 공감한 영화다. <가장 따듯한 색, 블루>보다도 더 따듯하게 느껴졌던 영화다.
사실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조금 독특한데, 이 영화를 주제로 한 강신주 씨의 강연에서 출발한다. 영화관에서 진행하는 강연이라서 (또한 많은 영화관에서 그렇게 진행하듯) 당연히 영화를 감상하고 난 뒤 비평이 따라붙을 줄 알았는데, 그냥 영화감상을 전제로 하고 영화 상영 자체가 없는 강연이었다;; 분명 강연 안내에 쓰여 있었을 텐데 내가 확인을 안 했던 것일 테고, 어차피 보려고 생각하고 있던 영화라서 별 거부감 없이 강연을 들었다. 그리고 스포일링이 없진 않았지만 결론적으로 강신주 씨의 해설을 먼저 듣고 영화를 본 게 더 유익했던 것 같다. (사족으로 강신주 씨의 책은 <철학 대 철학>이란 책을 조금 읽다 만 정도인데, 학교를 다닐 때에도 강연을 찾아다니는 걸 좋아했어서 무턱대고 신청을 했었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 세 장면 정도를 꼽을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베스트는 초반부에 일찍 나와버린다. 바로 엘로이즈(초상화의 주인공)와 마리안느(화가)가 처음으로 산책을 하는 장면. 지중해인지 대서양인지, 그것도 아니면 북해인지는 모르겠지만, 벼랑 끝으로 달음박질치는 엘로이즈를 따라잡은 마리안느의 옆얼굴이 엘로이즈의 옆얼굴과 실루엣이 '완전히' 겹친다. 서로 곁눈질하며 각자의 존재를 의식하는 순간에만 합치되었던 실루엣이 잠깐씩 흐트러지는데, 바로 이 장면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앞으로 상대의 페르소나를 확인하는 관계로 발전해나갈 것임을 이미지로 완벽히 보여준다. 다른 두 장면은, 영화의 중반부에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시선이 붙박힌 채 치마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르고 걸음을 옮기는 장면 하나와 영화 후반부에 해안가에서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흐느끼며 껴안는 장면 하나라 할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절제된 대화와 몸짓 속에서 주인공들의 감정이 쉴새없이 파도친다. 엘로이즈를 연기한 아델 애넬(Adele Haenel)은 얼마전 봤던 <디어스킨>에서도 인상깊은 캐릭터를 연기했었는데, '인상깊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 이 배우의 눈빛이 매우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역을 연기한 노에미 메를랑의 눈빛은 더 절절하다. 차분하고 냉철하지만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눈빛. 훈련된 연기겠지만 본인에게 어느 정도 베어 있지 않고서야 저런 연기가 가능하겠나 싶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의 마농이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화>에서 엘로이즈, 마리안느 모두 익숙한 배우들은 아닌데 벌써 이들 모두가 뇌리에 새겨졌다. 물론 치밀하게 계산하고 준비했을 감독에 비할 바 있을까. 영화가 막을 내릴 때까지 짜임새 있게 이야기가 전개되었으니.
강신주 씨가 말하는 것처럼 이 영화를 '퀴어 영화'라든가 '페미니즘 영화'라든가 굳이 어떤 틀 안에 규정하고 싶진 않다. 다만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전부 여성이고, 등장하는 남자들이라곤 아주 부수적인 역할—노젓는 사람이나 짐꾼—에 한정되어 있는 건 사실이다. 또한 감독 역시 여성이다. 이 때문에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이나 젠더 이슈에 대해 다뤄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고, 또한 '누구나' 생각해볼 법한 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 신화 중 하나인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설화를 모티브로 차용한 건 어떤 입장에 서서 해석할 것인가? 하데스는 에우리디케를 되살려주는 조건으로 이승으로 나갈 때까지 오르페우스에게 절대 뒤돌아보지 말 것을 명하지만, 오르페우스는 참지 못하고 뒤따라오는 에우리디케를 돌아보고 만다. 그리하여 에우리디케는 영영 지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신화 속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에게 평생의 연인으로 남는 대신에 추억을 곱씹는 시인으로 남고 싶었던 것일까?(마리안느의 입장) 또는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에게 자신을 이대로 떠나보내달라고 스스로 의사를 표시한 것일까?(엘로이즈의 입장) 사실 하녀 소피처럼 나 역시 단면적으로 생각하고 넘겼을 그리스 신화에 대해 입체적인 해석을 시도했다는 것만으로 지적인 자극을 받았다. 요컨대.. 음악, 연기, 배경, 풍부한 상징들까지 가득했던 설연휴 직전의 종합선물세트였다. 덕분에 기분도 조금 누그러진다.
페르소나(persona). 나는 나 자신의 페르소나를 어디까지 들여다 봤는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페르소나를 어디까지 헤아려 봤는가? 나의 페르소나를 가장 깊이 들여다봐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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