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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영화 두 편 : 두꺼비와 어느 영웅일상/film 2020. 1. 24. 01:51
<베니스 인 서울>이라는 작은 규모의 영화제를 찾아 오랜만에 서울아트시네마에 들렀다. 이탈리아 영화를 보는 것 역시 참 오랜만인데, 다양한 영화를 보여주는 이런 영화관의 존재가 감사하게 느껴진다. 이런 영화제 소식은 한국에 살고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일지라, 과연 관객석에는 이탈리아 사람들도 보였다. 이 <삶vivere>이라는 영화는 2019년 베니스 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진출한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거창한 제목에 큰 기대를 건 것일까 너무 피상적이고 아무런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다.
뭐 하나 제대로 파고든 게 없는 영화였는데, 가장 거슬렸던 장면은 미국식 교육환경에서 자라난 피에르파올로(루카 전처의 아들)가 이탈리아어를 배우러 로마에 온 아일랜드 유학생 마리안느에게 다짜고짜 '이탈리아는 쓰레기 국가야!!'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최근 국가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중세의 문화유산까지 중국에 매각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그런 문제들을 깊이 조명하는 것도 아니다. 베를루스코니의 부패한 악취를 연상시키는 마리오니 일가 안에서 묘사되는 것은, 막연한 가족애와 개연성 없는 남녀간의 사랑, 그리고 맥락없는 문화적 자부심 정도여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차라리 어느 하나라도 진득하니 다뤘더라면 어땠을지...뭘 건져야 할지를 모르겠을 정도. 그러고선 이웃과의 대화에서 이런 게 바로 삶일까? 하며 뭉뚱그리는 마지막 장면에서는..정말이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꺼비(앓고 있는 천식질환의 애칭(?))의 괴롭힘을 견뎌야 했던 수지와 루카의 어린 딸, 루실라만이 진실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준다. '사실은 진실과는 엄연히 다르다'고 말하는 옴므파탈homme fatal 루카는 사실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사실과 진실 중 그 어느 것도 귀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탈리아 영화를 접할 기회가 흔치 않다보니—특히나 동시대의 이탈리아 영화가 소개되는 경우는 더욱 흔치가 않다—이탈리아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간접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가령 움베르토 에코가 만성적인 특종경쟁과 가짜뉴스에 절어있는 이탈리아 저널리즘을 향해 던졌던 비판과 경고가 어떤 맥락에서 나왔던 것인지 영화를 통해 대충 유추할 수가 있다. 루카는 프리랜서 기사로 기사를 윤색하여 수입을 벌어들이는 인물이다. 이 집의 가정교사인 마리안느는 처음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실보도를 윤색(潤色)하는 루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뭐 결과적으로 루카가 끝까지 철면피처럼 기사를 난도질하지는 않는다. 정규직을 담보하는 먹잇감(장인의 부패와 일탈에 대한 보도)을 눈 앞에 두고 도의적인 이유로 거절하기 때문.
한편 세습재산으로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이탈리아 부유층의 모습은 언뜻 이탈리아 영화 <더 디너>—이 영화는 변호사와 의사 형제를 처음에는 각각 선:악 구도로 대치시키지만 다시 악:선으로 도치시킴으로써 현대 이탈리아 사회에서 '가진 자'들의 위선(僞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를 연상시킨다. 매사에 냉철하고 합리적인 마리오니 변호사(루카의 장인)는 자신의 허물을 가리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매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권위있는 의사이면서 (루실라의 치료를 빌미 삼아) 수지의 결혼사실을 알고도 끝없이 자신의 구애행동을 합리화하는 필립이라는 인물도 동일한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대물림되는 소득과 이로 인한 계급이동 둔화, 그리고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뒤틀려져 가는 '가진 자'들의 세계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경제수준이 일정 궤도에 올라선 나라에서 끊임없이 공론화되고 있는 문제이지만 또한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불공정과 위선 문제는 바로 이러한 사회현상에서 파생된다. 과연 어린 루실라가 20년이 흐른 뒤 청년이 되어 마주하게 된 이탈리아 사회는 어떠한 모습일까. 또한 이러한 사회현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대한민국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자문해보게 된다.
자신의 닮은꼴을 추적해나간다는 점에서 얼마 전 읽은 나보코프의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 그리고 따사로운 이탈리아의 풍광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연상시켰던 영화다. 또 한 인물에 대해 입체적으로 해석을 덧붙여 나간다는 점에서는 <라쇼몽羅生門>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거미의 계략Strategia del ragno>은 1970년 영화로 최근에 리마스터링되어 흑백영화가 컬러영화로 상영되었는데, 흑백영화에 이렇게 색을 입힐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컬러가 생생하다. 이탈리아가 문화재 복원기술에 뛰어나다고 하는데, 그런 기술력이 이런 영역에서도 발휘되는 건가 싶다. 여하간 기술가—아니면 예술가라 불러야 할까—의 열정 덕분에 오늘날 이런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건 일종의 행운이다.
영화는 타라Tara 역에서 시작한다. 모래색깔의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한 잘생긴 남성이 마치 불시착한 것처럼 기차에서 내린다. 그 전에 마치 필름에 구멍이라도 낸 것처럼 새하얀 옷을 입은 해군 한 명이 마찬가지로 새하얀 더플백을 플랫폼의 벤치에 던지며 열차에서 내린다. 좀전의 정장 차림이었던 남자는 타라에서 추앙받는 아토스 마냐니Athos Magnani의 아들이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아버지의 존재를 잊고 살아왔던 그는 근래에 아토스의 정부情婦였던 드라이파—그녀는 드레퓌스를 지지했던 자신의 아버지가 드라이파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소개하는데, 드레퓌스라는 일개 포병 대위가 첩자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프랑스 사회가 들썩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녀의 존재 또한 인지되기에 따라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방문객이이자 한 영웅의 아들인 남성이 다루게 될 복합적인 문제를 암시한다—라는 한 여성의 초대에 의해 마을을 방문하게 된다. 마을에 도착한 뒤에도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그는 마을사람들을 하나둘 마주치면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하나둘 물음을 던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단서에 따르면, 무솔리니 체제 하에서 반파시스트 운동에 앞장섰던 그는 극장에서 누군가의 배신에 의해 의문스러운 암살을 당했다. 여하간 신비스러운 아우라에 영원히 갇힌 채 아토스 마냐니는 타라라는 공간 안에서 완벽한 영웅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단서들을 하나씩 찾아가는 과정에서, 남자는 협잡挾雜의 냄새를 감지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반파시스트 운동을 제창했다고 하기에 아토스 마냐니와 가깝게 지냈던 세 명의 동료는 이념적으로 색채가 없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평범한 시민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으며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남자에게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마을사람들도 그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품고 있는 듯하다. 그는 한 술집에서 불쾌감을 드러내며 손님 모두에게 질문한다. 여기에는 나이든 사람들밖에 없나요? 젊은 사람은 없나요? 시간이 정지한 듯한 다른 차원의 공간에서 그는 영웅의 자식임에도 바로 그 영웅의 자식이 영웅의 죽음에 다른 해석을 갖다붙이려 한다는 까닭으로 환대를 받지 못한다.
기차에 내려 도착한 타라라는 공간이 단지 공간적으로 이질적인 것만은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곳은 앞서 산 사람들의 세계다. 무솔리니의 전제통치를 경험했던 세대가 사는 곳이다. 영화가 무대로 딛고 있는 시점은 파시즘이 종료된 시기로, 마을을 방문한 젊은 남성은 이미 다른 세계로 건너온 셈이다. 구세계는 이념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집단적으로는 이념이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념이 불분명한 세계였다. (반파시스트에 대해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반파시스트 운동을 벌였던 아토스 마냐니의 친구들을 보라) 이 시기를 살아간 세대들에게 이념Ideology이라는 것은 공기중에 감도는 무색무취의 무엇과도 같아서, 굳이 힘들여 습득하지 않아도 체화시킬 수 있는 것이었고, 발판 삼아 적을 겨누고 아군을 감쌀 수 있는 지도가 되어 주었다. 극장(아토스 마냐니가 암살된 장소)을 한가운데 둔 광장에 남자를 에워싼 마을사람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검정 차양遮陽을 드리우고 있는 장면은, 구세대가 경험했던 획일적이고 전제적이었던 이념의 세계를 상징한다.
이 영화는 마찬가지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작품인 <순응자Il conformista>를 떠올리게도 한다. <순응자>에서 무솔리니 치하 비밀경찰인 마르첼로는 콰르디 교수의 암살을 지시받고 그들에게 접근하지만, 일이 진척되는 과정에서 콰르디 교수의 아내 안나에게 이끌리게 되고 본연의 임무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는다. 마르첼로는 어디에도 충실할 수 없었던 순응자였던 것이다. 아토스 마냐니 역시 그런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 동료를 밀고한 아토스 마냐니는 반독재 운동이 추동력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묘안을 짜낸다. 마치 자신이 암살을 당한 것처럼 꾸며 반독재 운동을 위한 불씨를 남겨두겠다는 것.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밀고를 저질렀지만, 이를 덮어버리는 방식은 바로 자신을 영웅으로 만드는 작업을 통해서였다. 영웅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기획된 것이었던 셈이다.
죽음의 진실을 밝혀낸 뒤, 타라를 떠나는 열차를 타기 위해 역사驛舍에 멈춘 남자는 한참을 서성거리며 고민한다. 그리고 다시 마을로 들어온다. 그 자신도 혼란을 느끼는 듯하다. 아버지를 코빼기까지 닮았다며 애틋하게 대하는 드라이파는 그에게 아버지의 사파리복을 입혀본다. 남자는 아버지의 옷을 거부한다. 화면은 다시 잡초가 무성한 철로鐵路로 되돌아간다. 과연 그는 다시 그가 살던 1970년의 동시대—독재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무솔리니의 독재정권이 무너졌다고 하지만, 이처럼 기획된 세상 속에서라면 그가 속한 1970년이라고 해서 과연 믿을 만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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