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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기(?)에 접어든 올 한 해를 되돌아 보면, 목표를 이룬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지만, 일과 공부—프랑스어 공부와 재무공부—를 병행하면서 만성적으로 번아웃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스위스 여행을 다녀온 8월말을 기점으로 작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좋아하는 것'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겠다는 것이었다. 구차한 변명 같지만, 목표를 이룬다는 것이 나이가 들 수록 시간의 관성(慣性)에 치여 더욱 어려워지는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내게 가당치도 않았던 목표를 갈망했던 것은 아닌지, 왜 나는 이토록 어리석은지 두개골이 깨지도록 자기반성을 했지만 결국 뾰족한 답은 구하지 못했다.
다만 그간 내게 거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독서와 영화감상—특히 독서—을 한 해 동안 소홀히 해왔고, 정서적으로 꽤나 빈곤한 상태에 처해있다는 진단 정도는 내릴 수 있었다. 요즘 같은 무한경쟁시대—창과 방패가 없다뿐 사실상의 전시(戰時)상황—에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올인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지만, 올 가을은 그저 세월 좋아 보인다 하더라도 독서와 영화감상으로 마음의 적적함을 달랠 수밖에는 없었다.
여담으로 이틀전 단골 미용실 아저씨가 해주신 말씀이, 일본인 지인 중 와세다(早稲田) 대학 법학과를 나와서 연극에 빠져 10년간 극단의 스태프로 있다가, 돌연 의사가 되겠다며 의대에 진학한 뒤 지금 의사로 일하는 지인이 있다고 한다. 뭐 일본에서도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높으니 지극히 세속적인 결정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요(要)는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인도 여행을 이야기하다 어쩌다보니 곁가지로 나온 얘기였는데, 아저씨의 또 다른 일본 지인은 세계의 이곳저곳을 배낭여행 다니다 지금은 나고야(名古屋) 인근 소도시에서 유기농 작물을 기르는 공동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단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나는 정답에 목매며 살아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인생에 어느 정도 정답은 있기 때문에—또는 있어야만 하기에—윤리나 도덕을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사회구성원으로서 개인이 수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역할에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인간에게 공산품에나 들이댈 것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사실상 도그마(Dogma)에 가까운 한국의 '좋은 삶의 공식'과 이에 대한 교조주의자들의 행태는 거칠게 말해 제3세계의 독재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독재자가 일인이냐 절대다수이냐의 차이 정도 아닐까. 격한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는 대단히 경직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영화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기에 앞서 각론이 너무 길었는데, 최근 LA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세 편이나 연달아 개봉했다. 세 편의 영화 가운데 가장 먼저 접한 영화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라는 영화를 패러디한 영화가 아닐까 싶은데 정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라는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관계로 정확한 관련성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울프 오브 더 월스트리트>에 나온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무척 좋아하고(Je l'adore..), <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왔던 브래드 피트 역시 좋아하기 때문에(Je les adore!!!!!),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위시리스트 1순위에 올라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고 로비는 내가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리즈시절을 넘긴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라는 배우가 서부극을 전전하는 신파극(?) 분위기에 약간 지루한 느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라는 이웃 주민의 중간개입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유지시킨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즐겨 사용하는 서부극이라는 테마는, 이 영화에서는 영화 전반의 프레임으로 활용되는 대신 영화 속 액자로 차용된다.
후반부로 가면서 집중해서 보게 되는 대목은 '히피'에 대한 부분인데, 반전(反戰) 구호의 선봉에 서는 이들은 정작 결말지점에서 '할리우드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살인이다'라며 자신들의 살인행위를 정당화는 자가당착에 이른다. 그들의 자기 합리화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산산이 무너지고 마는데,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선(善)에 대해 말하는 자들의 위선(僞善)? 할리우드 영화의 폭력성 (또는 교육적인 측면)? 히피들이 침입에 실패하는 대목을 통해서는 할리우드라는 문화적 소프트웨어가 같는 철옹성같은 권력에 대해 고발하고 싶었던 것일까? 여러 궁금증을 자아낸다. (영화 안에 여러 흑백영화가 등장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배경지식이 없어 메타포를 추출해내지 못하는 점은 아쉽다)
Why do we assume that all this information is what we’re told it is?
Maybe there are people out there who are more important than us, more powerful,
communicating things in the world that are meant for only them and not for us.
흠...이 영화 IDMB 기준으로 평점이 그리 나쁘지 않다. 그런데 참 난해하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가 LA의 할리우드와 비벌리 힐즈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이 영화는 바로 이들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실버레이크에서 일어나는 일을 담고 있다. 이쯤 되면 비주얼 좋은 배우들과 화려한 파티 장면을 동원한 오컬트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는데, 어쩐지 사소한 기호에서 의미를 뽑아내려는 모습이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고 짐 캐리 주연의 <넘버 23>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샘(앤드류 가필드)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집행공무원이 쳐들어오기 전, 건너편 이웃집이었던 중년 여성의 집으로 잠입하는 장면은 좀 기발한 설정이었던 것 같기는 하다. 그가 묘령의 여인에게서 발견한 코드를 자신의 집 벽면에 무자비하게 남겨놓고, 오로지 육체적으로 신선함을 주는 중년여성에게로 넘어오는 모습은 비밀코드의 굴레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일까?
요즘과 같이 매체가 발달할 수록 유명인사들의 레토릭이 대중의 사고방식을 좌지우지하기는 더욱 간편해졌다. 그것이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든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든 말이다. 굳이 유명인사가 아닌 익명의 누군가도 누구도 쉽게 고안할 수 없는 자극적인 발언이나 영상으로, 단숨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오늘날이다. 언뜻 주인공 샘은 아———무런 실익도 없는 수수께끼들에 미쳐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야말로 오늘날 군상(群像)이기도 하다. 인스타로 휙휙 넘겨보는 사진들, 사실관계를 명확히 할 수 없는 유튜브 방송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정말 우리는 이것을 쌍방향적이고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 채널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Lotta the time we feel our lives are the worst.
But I think if you look in anyone else's closet, you wouldn't trade their sh*t for your sh*t.
So it's good.
LA 영화 트로이카에서 마지막 관람의 몫을 떠맡은 것은 바로 <미드 90>. 원제가 <Mid 90s>라 <90년대 중반>이라고 번안을 할 수는 없으니 <미드 90>라고 소개한 것 같은데, 처음에는 '미드'랑 관련된 영화인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아도 내 옆에 앉으신 아주머니 두 분이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영화인지 모르겠다고 계속 속닥이셨는데, 좀 더 이해하기 쉬운 제목으로 아예 다른 제목을 붙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음.. 세 영화 중에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보다도 더 전형적인 LA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허나 필자는 LA에 한 번도 가본 적은 없다+_+) 참고로 이 영화는 90년대 중반의 비디오 느낌을 주기 위해서인지 4:3 화면을 채택하고 있는데, 최근 영화들의 프레임보다 답답한 느낌이 있어 처음에는 적응이 좀 필요하다.
You literally take the hardest hits outta anybody I ever seen in my life
거친 욕설과 마약 흡입이 난무하고 마초스럽기까지 하지만 사실 많은 부분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소년의 성장기가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편모 가정에서 자란 소년 스티비(서니 설직)는 우정을 통해 자신의 심리적 손실을 보충하려고 한다. 스티비에게 우정의 끈이 되어주는 형들 또한 인생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한 조각씩 빠진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이지만 쉽사리 건들 수 없는 각각의 카리스마로 무장한 친구들이기도 하다.
글쎄 일반화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성장기에 있는 남학생들이 어린 시절 무리에 끼기 위해 겪는 시행착오가 다 이런 것의 한 종류가 아닌가 싶다. 같은 집단 안에서도 더 세어 보이고 싶고, 의리를 따지고, 별 것 아닌 것에 규율을 매기고, 동시에 입밖으로 내진 않지만 상대를 리스펙트(?)해주는 그런 것들 말이다. 물론 이 영화는 이러한 시간선상에 놓인 소년을 통해, 일개 어린 소년이 겪기에는 부조리할 수밖에 없는 환경과 이에 맞서는 저항정신—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멋진 영화였다. (참고로 영화 중간에 등장인물 여럿이서 분노참기 게임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히스패닉, 백인, 흑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으로 상대를 인신공격하는 대목에서 왠지 피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하간 의외로 LA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많지 않은데—특히 LA 고유의 시간적·공간적 배경에 천착한 영화는 더욱 드물다—짧은 기간 동안 세 편의 LA 영화를 연달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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