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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되는 반전(反轉) : 멜로와 추리일상/film 2019. 12. 8. 23:58
영화에서 큰 소득을 얻지 못한 11월달이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이 연거푸 스크린에 상영되었지만 단 한 편도 챙겨보지 못했고, 프랑스 영화도 벌써 여럿 개봉을 한 상태지만—<러브 앳>은 못보더라도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만큼은 보면 좋으련만..—요즘처럼 퇴근이 일정치 않아서야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공휴일이 하나도 없는 11월에는 크고 작은 영화제—단편영화제나 프리미어 영화제, 프라이드 영화제 등등—를 참관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었는데, 뭐 이미 예매해뒀던 키라 무라토바(우크라이나 여성감독)의 영화티켓도 '예정에 없던' 야근으로 인해 취소해야 했으니까...이젠 뭐 속상하지도 않다.
그런 가운데 간신히 건져올린 <시빌>이라는 영화는 내 오랜 갈증을 해소해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프랑스 영화가 내담자-정신분석가의 구도를 대단히 좋아하는지라, 개인의 심리를 파헤친다는 면에서 흥미로운 구성이기는 했으나 이 구도 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던 것 같다. 정신분석가로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실패한 여주인공 시빌은 자신 주위에 놓여진 관계 하나하나를 파탄(破綻)내어 간다. 이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것일까, 아니면 가족관계에서 충분히 형성되지 못한 애정 때문인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전 남자친구와의 잘못된 관계설정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까닭에 대해서는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여주인공 시빌이 어디에서 많이 본 얼굴이다 했더니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에서 싱크로나이즈 강사로 나왔던 여배우였다. 그 때도 알콜 중독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인물로 나왔었는데, 그 컨셉은 이번 영화에서도 동일하다;; 그리고 레아 세이두와 함께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대단한 연기를 펼쳤던 아델은 내담자로 등장하는데, 보는 사람의 마음이 무거울 정도로 상념(想念)에 빠진 모습이 굵직하게 묘사된다. 극에서 천하의 돈 후안 연기를 펼치는 울리엘 가스파르도 매력적으로 등장하고, <토니 에드만>에서 퉁명스러운 캐릭터로 나왔던 산드라 휠러(미카 役)도 여전히 색깔있는 연기를 선사한다. 어쨌든 따뜻한 지중해의 풍경과 톡톡 튀는 캐릭터들의 개성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스토리가 얄팍하게 느껴졌던 것은, 이 이야기가 '사랑'에 관한 것인지 '정신분석'에 관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권력을 얻기 위한 암투'에 관한 것인지 감독의 고민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
며칠간 철야로 일을 하고 오전 근무만 마친 뒤 퇴근할 수 있는 특권(?)이 생겼다. 같이 밤샘을 했던 직원들도 초주검이 된 얼굴로 뿔뿔이 집으로 흩어지고, 나는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이대로 집에 가서 침대 위에 쓰러지면 완전히 쳇바퀴를 달리는 직장인의 수렁으로 빠져들 것 같았으므로.. <러브 앳>을 볼까 <나이브스 아웃>을 볼까 저울질하다, 어느 것도 딱 꽂히지는 않아 좀 더 재미가 담보되어 보이는 <나이브스 아웃>을 택했다. 아무리 그래도 평일 낮인데 앞의 두 어줄을 빼놓고는 영화관에 빈자리를 찾아보기가 어렵다니.. 그만큼 관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배우들—다니엘 크레이그나 크리스 에반스 등등등—이 한몫 했겠지만, 탐정을 등장시켜 밀폐된 공간에서 실마리를 찾아나가는 방식의 고전적인 추리물이 이처럼 관객을 끌어모은다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닌 것 같아 신기했다.
간결하고 명료하다. 결말은 의심의 여지를 한 치도 남겨두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지는 다분히 코믹적인 요소는 트롬비 일가가 수시로 밑천을 드러내는 위선(僞善)이라 할 것이다. 겉으로는 젠 체하지만 누구보다 이기적이고 경솔한 트롬비 사람들.. 불법이민자로 등장하는 마르타가 귀족 행세를 하는 트롬비 일가를 보기 좋게 골탕먹이는 장면은, 반이민 정책을 통해 분노의 정치를 부추기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 할리우드가 노골적으로 조소(嘲笑)를 드러내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조금 뜬금없지만) 독특한 남부 억양을 쓰는 브누아 블랑(다니엘 크레이그)을 보며 나이가 들어서도 저렇게 멋져보일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_='' 오랜만에 남기는 영화 포스팅이 두서 없는 느낌이 있지만, 이쯤에서 매듭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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