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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을 모시고 성북동에 다녀왔다. 막 날씨가 후텁지근해지던 때라 백숙으로 보양(保養)을 한 뒤 카페로 향했다. 카페 그늘에서 시간을 보낸 뒤 선잠로를 따라 굽이진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성북동이 교통이 불편하기는 해도 몇 차례 왔었는데, 대사관과 공관이 많이 몰려 있다는 것은 이제서야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성북동을 왔던 게 5년도 더 된 일인데, 같은 공간을 다시 찾아도 발견하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에 새삼 놀란다. 도대체 이전에 나는 성북동에 와서 무엇을 보고 갔던 걸까. 선잠로를 따라 세 번째로 찾는 길상사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다 거닐었던 흙길인데 여기에 법정 스님의 유골을 모신 장소가 있었던가? 무소유(無所有)라는 법정 스님의 가르침보다도, 이 장소를 떠올리지 못하는 기억의 해미를 한참 살펴야 했다. 방향을 잡지 못한 채 물결 위를 낮게 나는 갈매기처럼. 기억이라는 것은 이렇게나 허술하다.
# DELF B2 시험을 보고 왔다. 취약 포인트라 생각해서 가장 집중해서 공부를 했던 게 청해였는데, 그런 노력이 무색할 만큼 어렵게 나왔다. RFI(라디오)를 들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무슨 아프리카말이 나오는 줄 알았다. 도대체 C1에서는 청해가 어느 정도 수준으로 나올지.. 청해 연습문제를 풀어볼 때보다 어려워서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결국 공부 부족을 탓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독해, 작문도 생각보다 어렵게 나왔다. Didier나 다른 연습문제도 그렇고 시험보다 좀 더 높은 난이도로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시험이 더 어려웠다. 시험장에 가면 체감하기에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보아도 어휘나 주제가 까다로웠다. 예를 들어 청해의 경우, 나는 심혈관(cardiovasculaire)에 대한 이슈는 미리 다뤘었는데 정작 시험장에서는 뇌(cerveau)에 대한 주제가 나왔고, 주제는 차치하더라도 대화 내용이 훨씬 심도가 있었다. 한편 독해에서는 Classe Inversée라는 아주 생소한 주제가 나왔다. 학교에서 학습하고 집에서 숙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집에서 원격으로 학습하고 학교에서 질의응답을 통해 숙제를 해결하는 교수법(pédagogie)를 뜻한다. 사실 학교에서 필요한 것은 일방향적인 지식의 전달이 아닌, 상호작용을 통한 배움의 확장이라는 것이 취지다. 작문의 경우 미리 공부했던 재택근무(télétravail)가 나왔다. 한 20분 정도를 브레인스토밍하며 도입부에서 망설이느라, 후반부를 허겁지겁 써야만 했다. 생산성(la productivité)과 복지(bon-être)를 근거로 재택근무의 필요성을 사장에게 설득하는 방식으로 편지글을 썼다. 끝에는 글자수를 잘못 세서 (분명 분량을 생각하며 적었는데) 모자라게 쓴 줄 알고 잠시 정신이 나갔다가, 다시 세어 보고 277자를 확인했다. 다쓴 글은 철자법을 확인해야 하는데 글자수 세는 것도 여의치 않았으니 제대로 검토했을 리 없다. 마지막으로 이튿날 치렀던 구술시험에는, 내가 고른 두 개의 주제(직장에서의 복장 하나와 영상 이력서(CV Vidéo) 하나)중에 당연히 그나마 익숙한 직장에서의 복장을 선택했다. 영상 이력서는 대면 채용이 어려워진 요즘 같은 시기를 의식하고 출제한 주제가 아닌가 싶다. (작문 주제였던 재택근무도 그렇다) 사실 지문을 받아들었을 때는 CV vidéo라는 프랑스 단어를 처음 들어서 나중에 집에 와서 구글링을 해보고서야 그 CV(Curriculum Vitae)라는 걸 알았다. 여하간 나는 정장(costume et cravate) 대신 캐주얼 복장(jeans et baskets)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입장을 피력했다. B1에서 골랐던 주제(스크린(l'écran; 스마트폰, 태블릿PC, TV) 중독과 소득계층에 따른 중독양상의 차이)보다 오히려 개인적으로 무난하게 느껴지는 주제였다. 마스크를 쓰고 면접을 해야 해서 좀 답답했고, 전혀 떨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두 명의 채점관 앞에서 말을 하려니 긴장이 되었다. 게다가 B2부터는 토론(Débat)이 따라붙는데, 채점관들이 이미 나와 반대되는 의견을 확고히 하고 있어서, 이에 굴하지 않고 내 의견을 개진하는 게 중요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지배적인 정장 위주의 복장문화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은행 같은 곳에서 고객이 직원의 캐주얼한 복장을 수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하는 질문들에서는 오히려 내가 반문하는 방식도 취해보았다. 캐주얼복장이 나의 성과에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상사에게 계획과 일정을 제시한 뒤 성과를 두고 서로 경과를 지켜보겠다는 초보적인 의견이라도 일단 던지고 봤다. 은행처럼 포멀한 복장이 요구되는 직장에서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 캐주얼한 복장을 입을 수 있게 선택권을 줘서, 은행을 찾는 고객에게도 근무복장에 대해 인식을 새로이 환기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고 답변했다. 사실 논리도 논리지만 상대의 철벽방어에 굴하지 않고 의견을 전개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이미 끝난 시험이지만 청해가 영 많이 아쉽고, 언어라는 게 하루이틀만에 되는 게 아니라는 걸―물론 그렇게 생각하며 공부를 했던 건 아니지만 공부시간이 충분하지는 않았기에―다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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