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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宮)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본과의 전란으로 두 차례 소실되었던 경복궁은 아직도 상흔이 가시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경복궁을 대신해 정무(政務)가 이루어졌던 동궐(東闕; 창덕궁과 창경궁)은 비록 화마는 피해갔지만 궁을 동물원으로 꾸미겠다는 일제의 농간까지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사실 외국에 여행을 가도 궁은 딱히 흥미로운 대상이 아니다. 마드리드를 여행할 때 레알 왕궁을 간 적이 있다. 처음에는 이베리아 반도 특유의 강렬한 햇살에 지글지글 안으로 타들어가는 듯한 건물의 백색 외관에 압도되었다. 안에는 벨라스케스와 고야의 작품에서부터 날렵한 금제(金製) 더듬이가 달린 일본갑옷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다양한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치스러움과 온갖 세속적 상징들이 생생하게 와닿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이곳 왕궁이 주인 없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약 백 년 전 명맥이 끊긴 조선왕조와 달리, 스페인은 아직까지 왕실이 있는 입헌군주국이지만 왕가는 더 이상 이곳 레알 왕궁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한 때는 권위를 드높이던 것들이 이제는 추앙할 대상도 없이 불필요한 의미를 과시한다. 누가 어느 방에 거처했고, 이곳에서 어떤 행사가 거행되었는지는 모두 권세 좋던 시절의 옛 이야기일 뿐이며 의미의 잉여다.
관광지로서의 성당 역시 내게는 큰 감흥을 주지는 못한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까닭이 크거니와, 입구를 통과하기도 전부터 방문객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온갖 부조(浮彫)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헤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의 발걸음을 성당으로 이끄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 아닌 높은 천장과 육중한 첨탑이다. 그러고선 신앙이 아닌 풍경을 찾는 사람처럼, 화려한 벽화와 성물(聖物)들을 뒤로 한 채 첨탑의 꼭대기에 이르는 나선형 계단을 서둘러 찾기 시작한다. 성당을 가득 메운 우화(寓話)와 신화는 신심을 북돋기 위해 의도된 것들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인간적인 냄새가 짙게 풍긴다. 그래서 이내 바깥의 공기와 도시의 전망이 그리워진다. 영원의 세계란 내게는 좀처럼 살갗으로 느끼기 어려운 막연한 것이다. 반면 모든 것을 아라베스크 양식으로 통일하는 모스크와 미나렛은 건축양식이 간소하기에 보는 이의 부담이 줄지만, 가장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무래도 이름 없는 사찰에 스치듯 머물렀다 갈 때일 것이다.
부산 초량동의 이바구길을 가면 당산(堂山)이라는 신령각이 있다. 채 20평방미터가 되지 않는 작은 목조건물이 주택가 한가운데 엉뚱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기 위한 사당(祠堂)이다. 사당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너무 추상적인 것도 아니고 너무 구체적이지도 않다. 또한 종교적인 것도 아니며 세속적이지도 않다. 너무 멀지도 않다. 너무 가깝지도 않다. 그래서 사당에 들어설 때면 나도 충분히 공명(共鳴)할 수 있는 이야기의 힘과 울림을 느낀다.
서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유적지는 단연 종묘(宗廟)다. 조선왕실의 사당인 이곳은 꽤 번화한 종로4가에 있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리 많지 않다. 이곳 종묘에서 정전(正殿) 앞 우둘투둘한 묘정(廟庭)을 거닐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곳에는 이층짜리 건물은 없고 따로 떼어 놓은 길따란 회랑(回廊)을 닮은 정전과 영녕전(永寧殿)이 도심 한복판에서 아주 완벽히 숨을 죽인 채 조선왕실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있다.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던 이곳은, 정치적 암투와 유혈사태가 벌어지던 궁궐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날이 갈수록 성대하게 축조되는 종교시설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요컨대 종묘는 사리사욕을 치적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되 신을 향한 열망을 담은 공간 역시 아니다. 현실과 이상 간에 어렵사리 이끌어낸 타협의 공간인 셈이다. 물론 그렇게 정초(定礎)를 닦았던 조선왕조도 600년이라는 긴 세월 끝에 비극적인 모습으로 스러져갈 수밖에 없었지만.
하루는 종묘의 서쪽 돌담길에 면한 카페에서 서너 시간을 보냈다. 서순라(西巡邏)길이라고 하는 옛스런 이름이 붙은 모서리에 위치한 카페에 손님이라고는 나와 아버지밖에 없었다. 나는 매끄럽지 않은 번역투와 고군분투하며 독서와 씨름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돋보기 안경을 걸치고 옆에서 조경책을 펼쳐 공부를 하고 계신다. 활자에 피로해져 앞을 바라보면 종묘의 돌담이 맞바로 보이는데, 뙤약볕을 쬐고 있는 정방형의 돌들을 보며 마음이 누그러졌다. 돌담 너머에 자리잡고 있을 종묘의 적막한 풍경을 되새기자, 마음 속에 피난처를 찾은 듯 안심이 되었다. 책 읽는 것이 지루해질 즈음 또 다른 손님이 카페를 찾았다. 경첩의 나사를 단단히 조이지 않은 탓인지, 나무로 된 문이 정적을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쿵하고 닫힌다. 이곳을 나설 즈음에는 두 테이블 정도에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으니, 우리가 마수걸이였던 셈이다. 그만큼 익선동에서 꽤 빗겨난 이곳은 몇 블록 거리를 두고 확연히 사람의 발길이 뜸했다. 어느덧 여름햇살은 무르익고 저녁이 가까워져 우리는 다음 약속 장소로 옮기기로 했다. 이윽고 문을 닫고 나서는데, 카페의 바깥에서는 두꺼운 문짝의 굉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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