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건의 바다여행/2021 무더위 한려수도 2021. 9. 18. 00:22
남해에 도착한 첫째날 저녁으로 모듬회 한상차림을 먹었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던 중에 가게 사장님이 관광 오셨냐며, 남해에 왔으면 꼭 금산을 가보길 권한다고 말씀하셨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와 함께. 독일마을 얘기를 꺼냈더니 거기는 그냥 잠깐 지나가면서 보는 곳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튿날 일정으로 금산을 가볼까 하고 잠깐 생각을 했었다. 지도로 찾아보니 꽤 높은 곳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어서, 등산 코스는 15분 정도로 짧은 것 같았다. 다만 남해에 계획했던 일정이 2박 3일이었기 때문에, 금산과 독일마을을 모두 다 들러보기는 어려울 것 같기도 했다. 3일차에는 다른 도시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이때까지는 통영을 갈지 여수를 갈지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소량마을과 대량마을을 쭉 지나친 뒤 결국은 독일마을 방면으로 접어들었다. 독일마을로 가는 길에는 잠시 설리해수욕장 옆을 스쳐지나갈 수 있었다. 설리해수욕장은 남해군에서도 규모가 큰 편에 속하는 해수욕장이다. 가파른 도로를 올라서 보니, 저 아래로 잘 벼린 낫처럼 예리한 초승달 모양의 백사장이 말끔히 바라다 보였다.
독일마을에 도착한 뒤 느즈막한 점심으로 슈니첼과 굴라쉬 등등 이름도 생소한 독일음식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독일마을을 둘러보려는데, 전날 가게 주인 아저씨의 얘기대로 막상 둘러볼 만한 것이 많지 않다. 파독되었던 한국인을 소개하는 박물관을 대신해 원예예술촌을 둘러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아니, 좋지 않은 생각이었다=_= 원예예술촌을 가기로 생각했을 때, 맨처음 생각했던 건 가평에서 갔었던 아침고요수목원처럼 그늘도 충분하고 조경도 아기자기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공원 초입을 제외하곤 나무가 울창하지도 않았고, 어쩐지 관리가 잘 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사유지여서 입장료도 저렴하지 않다.) 주거겸 상업공간으로 만들어진 여러 채의 이층집들은 세계 각국을 테마로 꾸며졌지만, 빈집인 채로 활용되고 있지 않아서 휑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다가 연일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이었으니, 원예예술촌에서 체력을 많이 소모했다. 결국 다시 독일 광장으로 나왔을 때는 후텁지근한 날씨에 맥이 풀린 상태였다.
독일광장의 풍경을 조금 살펴보고 났을 때가 오후 두 시쯤 되었던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 마지막에 동행하기로 결정한 엄마의 체력을 불필요하게 고갈시킨 것 같아, 그만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독일마을이 있는 물건리에서 숙소가 위치한 평산리는 정반대다. 오전에 평산리를 출발해 앵간만을 따라 유유히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 남해를 반 바퀴 돈 셈이다. 숙소로 되돌아가는 길에는 해안가를 따라 빙 돌지 않았는데, 물건리에서 평산리를 곧장 가로지르다 보면 봉화리라는 지역을 지나치게 된다. 우리는 이 마을의 한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내비게이션에 카페를 지정하고 이동했는데, ‘어쩌다 남해’에 가게 되었다. 카페 이름이 ‘어쩌다 남해’였다. 그런데 사실 내비게이션에 찍었던 카페는 바로 옆에 있던 또 다른 카페였다. 정말로 ‘어쩌다 남해’에 가게 된 것이었다.
빈 농가를 완전히 리모델링한 카페였다. 마루나 대청, 서까래 같은 것들이 옛것 그대로 남아 있어서 엄마가 카페의 정취를 좋아하셨다. 밖에서는 성가신 햇빛도 실내에서 바라보면 화사한 법이다. 카페의 주인 아주머니가 메뉴를 설명해주셨는데, 얘기를 나누던 중 원래 찾던 카페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주머니가 카페 문을 연지 이틀밖에 안 됐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봐뒀던 카페는 오래된 리뷰들이 있던 곳이었다. 뒤늦게 행선지를 잘못 짚은 것을 알고선 서로의 표정을 살피며 웃음을 터뜨렸다. 결론적으로 뜻밖에 찾은 공간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대로 좋았다.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와 함께 어느 정도 더위를 식히고 숙소로 되돌아 왔다. 숙소를 다시 나선 것은 저녁을 먹을 때가 되어서였다. 저녁으로 물회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평산항의 방파제에서 노을을 구경했다. 아직 7월이었으므로 해는 7시 하고도 30분이 지나야 수평선에 걸렸다. 남해는 서해나 동해와 다르고, 바다에서 바라보는 석양 또한 다르다. 평산항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밴쿠버를 여행 갔을 때 캐나다 플레이스에서 봤던 석양을 떠올리게 했다. 끝없이 꼴을 바꾸는 물결 사이로 북극의 오로라가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엄마와 나 모두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인물사진 여러 장을 남기며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은 기억 가운데 하나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