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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의 바다여행/2021 무더위 한려수도 2021. 9. 25. 00:16
남해에서 3일차는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여수를 갈까 통영을 갈까 고민한 끝에 통영을 가기로 했다. 사실 남해에서 머물렀던 평산마을은 여수와 훨씬 가까워서 처음에는 이동 부담이 적은 여수를 가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번 남해에 내려오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나폴리’라고 하는 통영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아마 남해에서 같은 숙소에 며칠 더 머무를 수 있었다면 남해에서의 일정을 더 늘렸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구체적인 일정이 가닥이 잡힐 즈음이 되어서야 숙소를 알아봤기 때문에, 이미 어지간한 숙소는 자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여하간 이틀째 독일마을 일대에서의 일정은 무더위로 인해 체력 손실이 발생한 상태였다. 앵간만 일대의 드라이브 코스를 포함해서 실외로 나갈 일을 최대한 줄였음에도, 한여름의 무더위를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사흘째에는 최대한 야외 활동을 줄이기 위해 남해 대정리에 위치한 돌창고 프로젝트라는 카페에서 오전을 보냈다. 독특한 이름만큼이나 기발함이 돋보이는 카페였다. 정미소—예전에 일제의 수탈이 이뤄지기도 했었다고 한다—로 이용되던 공간을 카페로 탈바꿈시킨 곳이었다. 외벽이 벽돌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워낙 오래된 건물이어서, 내부는 철골과 튼실한 목재로 덧대 골격을 다시 세웠다.
또 건물의 정중앙에 중정(中庭)을 두어서 채광과 통풍을 동시에 잡았다. 개방성과 투명성이 돋보이는 건물이었다. 3층으로 올라가면 비좁게나마 슬레이트 지붕 위에 전망대가 있어서 남해의 내륙 풍경을 잠시 살펴볼 수 있다. 1층에는 상시적으로 운영되는 도예공방이 있었다. 벽면 선반에는 아직 색을 입히지 않은 유백색 도자기들이 죽 진열되어 있다. 달항아리를 모티브로 삼은 것처럼 도자기의 곡선이 은은하다. 작업대 한편으로는 마치 팬톤북처럼 도자기에 입힐 색상과 질감이 모자이크처럼 펼쳐져 있다.
1층의 반대편에는 프로젝트성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판화 작품들이다. 작가가 상주하면서 관람하는 사람들 곁에서 작품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었다. 그림의 주제는 대체로 남해 풍경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귀여운 고양이, 남해의 아기자기한 건물들, 그리고 바다.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바다의 잔물결이 화면을 가득 채운 대형 그림이었다. 다색 판화의 특성상 여러 번 찍기 작업이 이뤄지기 때문에 고유한 입체감이 있었다. 에메랄드, 오팔, 사파이어, 터키옥...판화에 입혀진 색깔을 꼼꼼히 뜯어보면서 남해 여행중에 이런 색깔들을 봤던가 떠올려보았다.
카페는 2층에 있다. 메뉴가 다양하지는 않다. 독특한 점은 미숫가루 음료를 판다는 점이다. 예전에 정미소가 있던 자리여서 시그니처 메뉴로 넣은 것 같기도 하다. 음료는 1층 공방에서 만든 도자기에 담겨 나온다. 스푼 받침도 도자기로 되어 있다. 아마 작업을 하다 버리는 도자기들을 조각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싶었다. 카페에 머무르는 동안 이렇게 문화생활을 하는 느낌이 드는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카페를 나선 다음에는 통영을 가기 위해서 자연히 지나게 되는 지족항에서 잠시 멈추었다. 지족항에서는 해협에 무리지어 늘어선 죽방렴(竹防簾)을 볼 수 있다. 홍현리에서 석방렴이 물에 잠겨 어로를 볼 수 없었는데, 지족리에서는 죽방렴이 보이기는 했지만 역시나 바닷물이 높아서 빼꼼히 보였다. 때마침 멸치가 제철이어서 어물전에서 멸치를 구했다. 엄마는 서울에서보다 더 좋은 멸치를 싼 가격에 샀다고 만족하셨다.
통영에 도착해서는 무엇보다 가장 먼저 느즈막한 점심을 먹으러 동피랑으로 향했다. 통영이 ‘한국의 나폴리’라는 별칭을 얻었다면 이건 분명 항구의 아름다운 풍광 때문만은 아닌 게 분명하다. 사실 나폴리는 교통체증으로 이탈리아에서 악명 높은 도시이기도 하다. 동피랑으로 가는 길은 운전이 엄청 힘들었는데, 내비게이션을 보는데도 미로 같은 도로들, 폭 좁은 도로를 정신 없이 오가는 차량들 때문이었다. 해안 절벽을 따라 길이 굴곡지긴 했어도 마음 편히 운전했던 남해에서의 여행이 편했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 순간들이 많았다.
어쨌든 점심으로 아구찜을 맛있게 먹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꽤 늦은 오후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니 비커 속 잉크처럼 노을이 퍼진다. 그리고 시시각각 옷을 갈아 입듯이 하늘의 색깔이 바뀐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통영 앞바다를 보니, 이제서야 또 다른 의미에서 통영을 한국의 나폴리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