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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의 바다여행/2021 무더위 한려수도 2021. 9. 13. 00:41
요즘처럼 일상에 관해 딱히 쓸거리가 없을 때에는 지난 여행기를 정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이번에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여행은 벌써 한 달도 더 전에, 그러니까 7월에 다녀온 여행이다. 부여와 대전, 보은을 다녀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8월부터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꽤 바쁘게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7월 한 달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곳들을 몰아서 다녔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남해(‘바다’가 아닌 ‘남해군’이다. 사실 남해라는 지명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이 봤다)는 이미 두 차례 숙박을 잡았다가 코로나로 인해 번번이 예약을 취소했었으니, 이번 방문은 이미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번 여행기의 제목을 ‘한려수도’로 잡은 것은, 이번 여행에서 들른 곳이 남해와 통영이기 때문이다. 남해에서 이틀, 통영에서 이틀의 시간을 보냈다. 또 통영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잠시 거제도를 들를 기회가 있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이라는 것이 본래 동쪽으로는 거제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전라도의 여수까지 걸쳐 있다. 먼저 남해를 들렀을 때에는 여수로 넘어가는 걸 진지(?)하게 고려했었지만, 결국은 통영으로 방향을 틀었다. 통영 여행은 이야기할 거리에 비해 남해와는 꽤 다른 의미로 기억에 남아 있다.
서울에서 남해까지는 거리가 멀다. 순수하게 도로 위에서 보낸 시간만 다섯 시간 하고도 삼십 분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때문에 중간에 진주에 들러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진주는 군사훈련을 받으러 체류하기만 했었지 정작 어떤 도시인지는 모르는 곳. 다만 진주에 유명한 냉면 맛집이 있다는 건 군 복무를 하던 동안에도 들었던 적이 있어서, 예의 그 집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남해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멀지 않고 평점이 나쁘지 않은 냉면집에 들렀다. 냉면에다 육전까지 시켰는데 결과적으로는 별로 맛있지는 않았다. 맛을 그리 따지는 편이 아닌데도 그랬다.
우리가 남해에서 머물렀던 곳은 평산리로 남해에서도 서쪽에 자리잡은 곳이다. 때문에 석양이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고 맞은편으로는 밤마다 여수의 해안선에서 뻗어나오는 불빛이 훤히 바라다보이는 곳이었다. 여행의 첫날은 오로지 이동하는 데 시간을 다 썼기 때문에 다른 관광지를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다만, 진주에서 넘어오는 길에 숙소가 위치한 평산리로 곧장 향하는 대신 남해의 명소 중 한곳인 다랭이마을을 경유하기로 했다. 카메라의 배터리 충전을 하지 않아서 여러 사진을 남길 수는 없었지만, 7월말의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오랜 시간 풍경을 만끽하며 머물렀다. 아주 오래전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던 남해를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다.
다랭이마을은 이튿날 다시 한 번 들를 기회가 있었다. 평산리를 출발하여 석방렴이 있는 홍현리로 가기 위해서는 자연히 다랭이마을을 지나게 되기 때문이다. 전날보다는 전망이 더 높은 곳에서 느긋하게 계단식 논밭을 조망할 수 있었다. 문제는 썰물과 밀물 시간을 미리 알아보지 않아, 홍현리의 석방렴에 도착했을 때 정작 석방렴이 바닷물 아래로 가라앉아 온데간데 사라졌다는 것뿐. 석방렴은 돌(石)을 쌓아 물고기를 잡는 방식으로, 죽방렴이라 하면 대나무(竹)를 이용하는 것이 된다. 죽방렴은 이후 남해에서 사천을 넘어가는 길에 가까이 볼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그 길로 앵간만의 연안을 따라서 원천항과 벽련항, 두모항을 지나쳤다. 벽련항을 지나면서부터는 가까이에 작은 섬 하나가 보인다. 노도(櫓島)다. 「구운몽(九雲夢)」의 저자 서포 김만중이 여생을 마친 곳이기도 하다. 두모항에서 노도가 가장 가까이 보일 때까지 쉬지 않고 길을 달린다. 이윽고 소량(작은 양아)마을과 대량(큰 양아)마을이 나타난다. 마지막에 다다른 이 두 마을은 400년 전 경기도 임진강 유역의 양아리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하여 조성한 마을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문관이었던 김만중이 노도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나, 중부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남쪽 섬마을 깊숙한 곳에 터를 잡게 된 것이나, 그 구구절절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보다 더 노마드(Nomad)한 삶인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마침내 대량마을의 어느 방파제에 멈추어섰다. 이 길을 따라 더 가도 막다른 길이 나올 뿐이다. 앵간만의 동쪽 일대는 비록 관광객들이 많이 찾지는 않지만, 한려해상국립공원에서도 상당히 커다란 면적을 차지하는 곳이다. 하지만 얼마 전 다른 기사에서 오랫동안 개발제한구역에 묶이는 바람에 주민들의 불만이 크다는 글을 읽기도 했다. 어쨌거나 방파제를 정면에 두고 서면, 대량마을의 쪽빛 포구너머로 야트막한 숲이 보인다. 그 숲은 대부분 침엽수림이지만 유독 한여름 대숲이 연둣빛을 뿜어내며 언덕에 싱그러운 얼룩을 그린다. 마음이 아주 차분하게 평온해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스라이 대숲을 바라본다. 낭창낭창 흔들대는 대나무들은, 직선도 곡선도 아닌 것이 마침내 내 안에 이름 모를 선(線)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