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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호의 바다여행/2021 무더위 한려수도 2021. 9. 30. 17:33
이튿날 새벽 다섯 시 경 눈을 떴다. 정확하게는 눈이 뜨여졌다. 여름의 아침은 부지런하다. 벌써 동쪽으로 해가 터오고 있었다. 나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먼길을 이동하는 동안 리듬의 일부가 깨진 모양이었다. 어쨌든 통영에서 묵는 숙소는 장평리에 위치해 있었다. 즉 통영의 북동부 지역이다. 테라스로 나서면 거제대교와 신거제대교가 한 눈에 보인다. 남해에서는 서쪽으로 바다에 면한 항구에 머물렀기 때문에 노을을 구경하기 좋았다면, 통영에서는 해돋이를 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해가 뜨는 맞은편 방향에서부터 길다란 구름 몇 가닥이 선혈(鮮血)에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서 법경을 읊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새벽에 작은 법회 같은 것이 열리는 모양이다. 생경한 소리와 생경한 풍경에 잠시 기분이 몽롱해진다. 아직 잠에 취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간밤에 거센 빗줄기가 이 가느다란 해협을 훑고 지나갔기 때문에, 한결 습기가 가신 상쾌한 공기가 살갗을 덮는다. 제법 시원하면서도 오늘의 더위를 예고하는 듯한 긴장감이 베어 있다. 이윽고 다시 잠들었던 것 같다.
처음부터 아예 전망이 좋은 곳에 숙소를 잡았다. 테라스로 나가면 통영 내륙과 거제도가 마주하는 바다가 바로 내려다 보인다. 성수기였지만 다행히 하나 남은 방을 예약할 수 있었다. 대신 통영의 유명 관광지에서 멀어지는 건 감수해야 했다. 여행 나흘차 오전, 엄마는 숙소에서 휴식을 원하셨고 나는 두어 시간 혼자 드라이브를 나섰다. 전날 통영 시내에서 운전이 힘들었던 터라 통영항 방면으로는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숙소에서는 거제도가 아주 가까웠다. 통영과 거제시를 이어주는 거제대교가 코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도를 확인한 다음 거제도에 딸린 작은 섬, 가조도로 가보기로 했다.
가조도까지 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딱히 정해진 길이라는 게 없었으므로, 거제도와 가조도를 잇는 연륙교를 건넌 뒤 반시계 방향으로 섬을 일주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지도상으로 볼 때 가조도는 모래시계처럼 생겼다. 섬의 잘록한 지점을 지난 뒤 옥녀봉을 중심으로 동쪽 방면으로 쭉 돌기 시작했다. 중간 지점에 잠시 멈추어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불과 10여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바로 남해와 면한 카페였다. 시원한 카페라떼를 마시면서 가만히 앉아 남해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바다가 뭍으로 이어지는 북쪽 방면인데도 수면이 티없이 깨끗하다. 멀리 왼편으로는 양식장이 무리지어 있는 것이 보인다. 라탄 소재로 근사하게 꾸민 카페이고 성수기인데도 사람은 거의 없어서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별 생각없이 목적지를 정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여정을 돌아나오는 길에는 풍경이 시선을 잡아 끌 때마다 차에서 내려 사진을 담았다. 그렇게 계도항과 창촌항, 신전항을 하나씩 스쳐 지나쳤다. 한 번은 대형 트럭이 길을 막아서고 있었는데, 무슨 자재를 실어 이동하려는 참인 것 같았다. 바로 옆은 작은 공장이었다. 이렇게 작은 섬에도 공장이 들어서 있구나, 하면서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경치를 둘러보다 예상치 않은 장면을 마주하는 것이, 어찌보면 모든 게 순탄했으면 하고 바라지만 막상 원치 않는 무언가를 마주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올 때는 거제대교로 왔지만 갈 때는 신거제대교를 이용했고, 잠시 멈추어 거제도에서 통영을 바라보았다. 노란 크레인이 풍경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 말고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곧 숙소로 되돌아왔고 오후에는 통영을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통영을 구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