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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의 일기: 시간의 상대성Vᵉ arrondissement de Paris/Février 2022. 2. 7. 21:23
# 오전에는 카페와 도서관에서 수업자료로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비가 온 다음날에는 어김없이 날이 개어서, 오늘도 무척 화창한 날씨다. 파리의 위도는 서울보다 높기 때문에 하루하루 해가 길어지는 시간도 더 커야 할 것 같은데, 체감하기에 해가 길어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아침 여덟 시가 지나야 해가 떠서 하루가 늦게 시작되는 기분이 든다.
오후에는 14구에서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점심을 먹은 다음에 버스를 타고 14구로 이동했다. 오늘도 몽수히 공원 일대에는 조깅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평소 내리던 곳보다 한 정거장 더 지나서 내렸다. 거리상으로 큰 차이가 없어 보여서 안 다니던 길로 걸어가볼 생각에서였다. 말로만 듣던 시테 유니벡시테 인근을 거쳐 학교로 걸어오게 되었다.
오후 수업으로는 연금 정책에 관한 수업을 들었다. 수업에서 다양한 개념을 간명하게 소개해주는데, 오기 전까지 복습을 하지 않았더라면 따라가기 힘들었을 것 같다. 세 시간 짜리 강의라고는 하지만 한 강의에 상당히 많은 양이 다뤄져서 수업자료로 항상 100장 안팎의 슬라이드가 제공되고 레퍼런스로 나오는 논문도 많다. 오늘도 수업자료는 100 슬라이드가 넘어가고 시간은 부족해서 예정된 수업 시간을 넘겼다. 그냥 지나가도 되는 수업인데 한 마디라도 더 던지고 싶어서 연금의 확정급여형(Defined Benefit)과 확정기여형(Defined Contribution)과 관련된 질문을 했다.
# 수업이 끝난 뒤에는 14구 안에서 생필품—옷걸이와 수건—을 사서 5구로 돌아왔다.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푼 다음 팡테옹으로 향했다. 생 주느비에브 도서관을 가기 위해서였다. 생 주느비에브 도서관은 기숙사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공공도서관으로, 학교 도서관의 운영시간이 짧다보니 공공도서관이라도 이용해볼까 싶어 출입신청을 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는 최종적으로 출입증을 수령하는 일만 남은 상태. (절차도 여러 가지다..)
도서관 직원은 괴짜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잖아도 투명 가림판 때문에 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는데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조곤조곤하게 신원 확인과 도서관 안내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안 들린다고 하니 그제서야 가림판을 우회해서 소리가 잘 들릴 수 있는 위치로 오라고 한다. 출입 절차를 마무리한 다음에는 도서관 안에 들어가 보았다. 공부할 거리를 들고 온 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곳인지 확인만 해두었다.
생 주느비에브 도서관은 다량의 책도 소장하고 있지만, 대학이 밀집한 라탕 지구 일대에서 열람실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열람실에 사람들이 정말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서 정말이지 혀를 내둘렀다. 노량진이나 강남의 학원가처럼 마주앉을 수 있는 책상마다 학생들이 빈틈없이 앉아 책을 파먹을 것처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학구열이 어지간한 동아시아 학생들보다 낫다고 느껴지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기서 공부를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밀착되고 환기가 잘 되지 않는 환경이어서 코로나에 대한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제 기숙사에서 만난 엘루아즈라는 여학생은 실내에서 어째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싶더니 본인이 코로나 양성이 나왔다고 말한다.) 어지간하면 무던히 지내려고 하는 편인데 이곳은 너무 사람이 많아서 그냥 학교에 있는 게 낫겠다 싶다.
도서관을 나선 다음에는 몇 가지 장을 보았다. 여분으로 레토르트 쌀밥도 몇 개 더 사고, 크림치즈, 바게트빵, 화이트 와인 등을 샀다. 먹는 게 뭐라고 이러나 싶기도 하지만, 사실 지출 대부분이 먹는 데에서 발생하다보니 장 보는 데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비싼 식자재—치즈, 와인, 바게트 등—가 굉장히 저렴하고, 육류, 생선류와 같은 재료들도 한국과 비교해 적어도 비싸지는 않다는 점.
# 나는 맛에 민감하지 않은 편인데 프랑스는 세계적인 효모 종주국 중 한 곳이기도 하고 밀가루도 다른 걸 쓰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아주 저렴한 빵조차도 맛이 있다. 이런 빵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값이 세네 배로 뛰고, 그마저도 그런 빵을 만들 수 있는 빵집이 많지 않아 생각난다고 해서 집앞에서 사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여기서도 무언가 가미된 빵들—quiche, pizza, dessert—은 값이 뛰기 시작한다. 일단 인건비가 가미된다 싶으면 돈을 지불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곳은 조금이라도 인건비가 들어가면 가치가 확 뛴다.
# 노동경제학 첫 수업에서 노동력은 다른 재화나 서비스와는 달리 ‘생애의 특정 시간’에 값을 매긴다는 점에서 특수성을 지닌다고 했다. 그렇게 정의를 내리고 나면 사람의 손이 조금이라도 닿은 물건에 높은 값을 지불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얼마전 한식당에서처럼 짜장면 곱배기 한 그릇과 군만두 한 접시를 먹고 나서 3만 원 넘게 지불할 때, 이곳에서 ‘사람이 들이는 시간’이 그렇게까지 남다른가 하는 생각을 구매자로서는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고급스럽고 건강한 빵의 가격이 뛰는 것처럼, 이곳도 먼 동아시아 요리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공수하고 그에 걸맞는 레시피를 적용할 줄 아는 것은 남이 흉내내기 어려운 경쟁력이 될 수도 있다.
다만 한식당처럼 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들기는 했지만—반대로 예를 들어 한국에서 북유럽 레스토랑을 찾는 게 대단히 어렵다면 가격이 오르는 건 납득할 만하다—서비스업과 관련된 것이라면 이곳의 일반적인 물가는 한국과 비교해서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물론 메뉴가 준비되는 방식이나, 품질 등이 확실히 좋아서 그만큼 값이 비쌀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면서 물건이나 서비스가 형편 없다고 느낀 적은 없다. 그런 프랑스의 최저임금은 2020년 기준으로 주 노동시간 35시간에 10.15유로다.
궁금한 점은 각양각색인 식당과 고급 상점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이런 구매력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부분이다. 여러 수업을 듣다보면 프랑스에서 조합의 막강한 협상력과 피고용인 중심의 고용계약에 대해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일부 교수들의 의견을 접하게 된다. 일하는 사람들의 근로의욕은 점점 약해지고 국가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레 지구처럼 특히나 물건이 다양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많은 지역에 가면 프랑스 사회의 활력은 유럽 평균 이상의 사회보장지출로 지탱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고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쉽게 결론을 내리기에는 또 다른 지점이 있지 않을까 하면서, 더 지켜볼 일이라고 유보해 놓기도 한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프랑스는 기초과학이 강해서 항공산업이나 제약업도 발달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서비스업의 비중도 크다. 우리나라와 달리 산업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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