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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의 일기: 시테Vᵉ arrondissement de Paris/Février 2022. 2. 8. 19:40
# 이른 아침은 노동경제학 수업이 있는 날이다. 오늘의 주제는 조합과 집단협상으로, 미시경제학 관점에서 설명이 이루어졌다. 어제 수업도 그렇고 오늘 수업도 그렇고 지난 주보다 내용이 더 어려워진 것 같다. 아직 영어에 익숙해지지 않은 건지, 프랭글리시에 익숙해지지 않은 건지, 언어 장벽도 여전하다.
수업이 끝난 후 프랑스의 근로자의 노조가입률이 낮음에도 협상임금을 적용받는 비율이 높은 이유를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는 프랑스의 경우 각 산업 분야마다 거대한 노조가 있고, 회사 수준에서 노조에 가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즉, 근로자 개인 수준에서 회사 노조에 들지 않더라도, 회사가 단체협상에 나서기 때문에 협상임금이 근로자 개인에게 자연히 적용된다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 근로자의 노조가입률은 10% 안팎에 불과함에도, 협상임금을 적용받는 비율은 100%에 수렴하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이다. 그럼 도로에서 집단행동 하는 사람들은 뭐냐고 물으니, 그건 그냥 여기 문화라고.
# 이른 아침 노동경제학 수업이 끝나면 11시부터는 온전히 자유로운 시간이다. 어중간한 시간이어서 학식에서 식사를 한 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테(cité)로 향했다. 요즘 읽고 있는 『프랑스혁명사』의 무대,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와 팔레 드 쥐스티스(Palais de justice)를 가기 위해서다.
가는 길부터가 쉽지 않았다. 시테섬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팔레 대로(Bd du Palais)는 경찰 병력으로 인해 차량통행이 금지되기 일쑤다. 원래대로면 이 팔레 대로를 타고 샤틀레 광장으로 직행해야 하는데, 경찰병력이 배치된 바람에 왼쪽으로 빙 돌아 퐁뇌프 다리를 건너야 샤틀레 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시간을 많이 잡아 먹었다. 특히나 천변로(Quai des Grands Augustins)는 한낮에도 자주 막힌다.
여차저차 샤틀레 광장에 도착해 입장권을 끊으려고 했더니 매표소도 점심 시간이 있단다. 그것도 거의 2시간 가까이. 내가 도착했을 때 막 점심시간에 들어간 차여서 할 수 없이 인근 카페에 들어가 커피라도 마시고 있었다. 아직까지 이 사람들의 일처리에 방심하고 있는 걸 보면, 적응이 덜 되었나보다. 점심시간에도 입장객을 받으면 매표소도 열려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게 아닌가보다.
# 먼저 콩시에르주리로 향했다. 콩시에르주리에 관한 설명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 끌었던 건, 고딕양식 지어진 유럽의 여러 건축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홀이라는 점이다. 그런 공간이 강의 한복판 섬에 지어졌다는 게 일단은 신기하다. 시테섬을 왕래하면서 보는 건물의 외관만 보아도 규모가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흥미로웠던 점은 이곳이 기본적으로 수감공간이라었다는 점이다. 14세기에 처음 지어질 때만 해도 왕궁으로 지어져 수천 명의 관료들이 왕래하는 공간이었다고 하는데, 15세기 이후 루브르로 궁전이 이전하면서 감옥으로 활용되기 시작한다. 콩시에르주리의 바로 옆에는 재판업무를 보는 공간(Palais de justice)이 있고, 그 바로 옆으로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성당 생트 샤펠(Sainte Chapelle)이 위치한다. 시테라는 이 조그마한 섬에, 성스러운 보물을 모시는 공간, 정의를 다스리는 공간, 폭력이 난무하는 공간이 집약되어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콩시에르주리는 마리 앙투와네트, 마라, 당통 등 프랑스혁명 당시 많은 유명인사들이 투옥되었다가 처형 판결이 내려진 곳이다. 처음에는 왕궁을 목적으로 마련된 공간이, 죄수들을 가두는 공간으로 이어지고, 혁명 상황에서 필요로 하는 법적 집행들이 긴박하게 이뤄졌다는 게 묘하게 다가왔다.
입장객에게는 증강현실 기법을 활용한 태블릿 PC가 주어져서 콩시에르주리의 이곳저곳을 현장감을 느끼면서 관람할 수 있다. 입장하면서 보안검문을 하는데 보안관이 나한테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하길래 어떻게 한국인인 줄 알았냐고 물었더니, 마스크 보고 알았다고 한다.
# 생트 샤펠은 규모 면에서는 아담한 성당이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현란한 색채 때문에 감탄이 절로 나오는 곳이었다. 콩시에르주리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생트 샤펠에는 길게 있을 수 없었지만, 한번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스테인드글라스의 경우 현대에 와서 세밀하게 복원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이런 오래된 유적이 많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곳은 유물이나 유적의 복원작업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수요가 많은 것으로 안다. 그냥 기술만 있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재료의 올바른 배합을 위해서는 화학이, 손상된 부분의 적절한 재현을 위해서는 고고학 등에 대한 전문적 지식까지도 필요로 할 것이다. (여기 업무방식에 진저리가 난 상태였다가 콩시에르주리와 생트 샤펠을 둘러보다보니 반감이 나도 모르게 가라앉는다. 이 사람들이 속터지게 일하는 방식과 다른 한편으로 화려한 문화를 번갈아 접하다 보면 롤러코스터를 타듯 오락가락 하는 것 같다ㅠㅠ)
늦은 오후 수업을 청강하려고 생각해둔 게 있어서 서둘러 나오려다가, 팔레 드 쥐스티스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프랑스 혁명사』를 읽다보면 18세기 왕실의 개혁을 가로막았던 주요세력 가운데 하나로 법복 귀족이니 대검 귀족이니 하는 단어들이 등장한다. 폐쇄적인 세습제와 엽관제를 통해 자신들의 특권을 철통같이 유지하고, 자신들의 이익에 벗어나는 사회 변화에는 반대표를 던졌던 귀족 계층이다. 혁명 국면을 눈앞에 두고 개혁 의지를 보였던 프랑스 왕실이 신속하고 유연하게 대응할 수 없었던 데에는, 왕의 명령이 발효되지 못하도록 번번이 틀어막은 재판소와 이를 장악하고 있는 귀족들의 구태의연함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왕궁 터에 남아 있는 건물인 만큼 매우 오래된 느낌이 풍기는 건물이다. 건축물의 정면에는 기둥 사이로 자유, 평등, 박애라는 문구 아래에 프랑스 삼색기 문양이 원형 방패 모양으로 새겨져 있다. 혁명 이후에도 법복 귀족의 전통은 그대로 남은 듯, 법률 업무를 보는 사람들 또한 복장에 대단히 격식을 갖추고 있다. 무릎 높이에서 가위로 방금 자른 듯한 검정 망토를 두른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아마 의뢰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 시테 섬을 짧게 둘러본다는 게, 매표소를 대기하는 것부터 포함해 한참 늦어졌다. 늦은 오후에 들어보려고 마음먹었던 수업에 지각하는 건 확정이었다. 오늘 들으려던 수업은 영어 수업으로, 이곳에 와서 영어와 프랑스어, 프랭글리시(?)까지 한꺼번에 접하다보니 부하가 걸린 것 같아, 학기가 시작한 지는 좀 되었지만 영어 수업을 하나 참여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각은 확정이라지만 교실을 찾으려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교실을 찾는 것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다행히 수학과의 젊은 교수 한 분이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주었다(!!) 수업은 영상물—굉장히 오래된 흑백 영화다—을 시청하고 감상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시퀀스나 극의 전개, 사회적 의의 등에 대해서 의견이 오고 가길래 미학이나 영상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듣는 전공수업인가 하고 내심 강의실을 빠져나와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가르치는 사람도 영화에 대해 매우 해박한 듯하고, 켄 로치 등 특정 영화감독에 대해서도 수시로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수업을 진행한 ELS에게 물으니, 배경지식이 전혀 없어도 그냥 들어도 상관 없다고 한다. 학점인정이 필요 없으면 더욱이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도 된다고. 평소 좋아하는 영화를 주제로 한 수업이어서 관심은 가지만, 이미 다른 수업도 많다보니 시간을 잘 짜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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