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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의 일기: 밤비Vᵉ arrondissement de Paris/Février 2022. 2. 10. 18:11
# 요즘 개설되었거나 리뉴얼된 홈페이지는 괜찮은 편이지만, 종종 프랑스의 인터넷 환경을 보면 말 그대로 ‘내 눈을 의심할’ 때가 있다. 학교메일이나 포털사이트, 은행업무를 볼 때, 도스에서 윈도우로 갓 넘어온 듯한 화면을 접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한 이 사람들이 유저 인터페이스에 대한 감각은 전혀 없는지, 가독성도 떨어지고 활자도 구식이어서 화면 어디서부터 들여다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학제나 과정이 복잡해서 입력값을 넣는 일도 주의를 기울여야 해서, 꼭 처리해야 하는 절차임에도 접속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 오늘 아침은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책을 읽거나 기초적인 프로그래밍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에 가까워질 수록 사람이 는다는 것을 빼면 가볍게 공부하기 좋은 장소를 발견한 것 같다. 아침 댓바람부터 자판기 커피를 세 번이나 뽑아먹으며, 필요한 공부들이나 처리해야 할 행정업무들을 들여다보았다.
오후에는 엘렌의 기초회화 수업을 들은 뒤, 곧장 문화인류학 수업을 들으러 장소를 옮겼다. 나처럼 다른 학과에서 온 학생들이 20% 정도 되는데, 신경과학, 심리학, 인지공학, 경제학 등 그 종류 또한 다양하다. 오늘은 문화와 진화에 관한 약사(略史)를 다뤘다. 이런 내용은 내가 평소 관심있어 하는 분야이고 흥미로운 교수 설명에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내가 다루려는 분야와 접점이 생길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다만 교수와 조교의 수업 진행이 매우 좋고, 방법론 연습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계속 들으려는 생각이다. 한국에서 어학을 공부할 때에는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많지 않은데, 막상 현지에서 직접 언어를 맞닥뜨리고 보니 한참 더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약간의 뻔뻔함)인 것 같다.
# 문화인류학 수업이 끝난 뒤 기숙사로 돌아와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오후 수업을 4시간 연달아 들었더니 저녁 수업을 들어갈 수 있을까 싶었다. 그냥 말끔히 잊고 저녁은 쉬려다가 이번에도 엘렌이 진행하는 고급작문 수업을 들어갔다. 개인적으로 점심에 진행되는 기초회화 수업은 내게 쉬운 반면, 저녁에 진행되는 고급작문 수업은 어렵다. 중간 난이도 되는 수업이 마땅치 않아서 한동안은 두 수업 사이에서 적응을 해야 할 것 같다.
오늘은 caracterisque와 관련된 다양한 표현들을 둘러본 다음, aborder의 어원학적 의미를 뜯어보았다. 작문수업이지만 중간에 말하기 연습이 포함되곤 하는데, 오늘은 파리 메트로의 역명(驛名)을 소리내어 읽는 것이다. (다들 이게 뭐야? 의아스러워 하는 분위기였다.) 엘렌은 평소 메트로에서 수령할 수 있는 지하철 팸플릿을 학생들에게 돌린 다음, 가장 길고 복잡한 역명을 골라서 소리내어 읽은 다음 파트너와 서로의 억양을 검토하라고 한다. 프랑스어다운 발음이 되기 위해 악상(accent)을 여러 방식으로 넣어보는 연습인 것이다.
École vétérinaire Maisons-Alfort. 내가 고른 역명이다. 엘렌의 설명에 따르면 파리에 메트로가 빼곡히 들어 차 있는 만큼, 20개 구(arrondissement)를 돌아다니면서 각 지역에서 사람 사는 모양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각 구마다 삶의 방식—무엇을 입었는가, 어떤 식으로 말하는가, 버스를 타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곳에 온지 이제 한 달이므로 아직 그런 미묘한 차이를 간파하지는 못한다. 다만 같은 동부 안에서도 라탕 지역보다는 생제르망 지역이, 바스티유 일대보다는 마레 지역이 더 좋아 보인다는 정도만 안다.
하지만 거리에 고급의류점들과 갤러리, 귀중품점이 즐비해도 막상 파리 사람들의 옷차림은 대개 후줄근하다. 자주 보이는 복장 코드가 있기는 하다. 롱코트에 목이 높은 신발, 스카프. 가끔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무스탕 차림도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은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옷차림이다. 오히려 멋을 내보겠다는 학생들의 옷차림이 더 나아 보일 때도 있다. 사람들 외관만 봐서는 이런 고급상품들은 누가 소비하길래 이런 가게들이 이렇게 많을 수 있는지 신기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내가 사는 지역의 특성일 수도 있고, 실은 좋은 물건들인데 내가 못 알아보는 것일 수도 있다.
# 엘렌의 수업중에 갑자기 바깥에서 후두둑후두둑 소리가 났다. 밤비였다. 이렇게 비온 뒤에는 다음날이 항상 맑았는데, 내일도 날씨가 맑으려나 모르겠다. 요새는 일기예보가 기본값으로 ‘흐림’인데 기상변동에 따라서 맑아지기도 하고 비가 오기도 하는 식이다.
오늘 저녁 수업은 전홍(Z)이라는 중국인 유학생과 짝을 이루어 몇 가지 연습을 했다. 잠시 개인적인 나누다보니 20세기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는 박사과정에 있다고 한다. 확실히 이곳에는 철학이나 수학보다도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많은 것 같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겠지만 한국 드라마 얘기를 꺼낸다. Z가 왔다는 상하이에서는 스탑오버를 하느라 와이탄(外滩)을 잠시 구경한 게 전부이고, 중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큰 나라이다보니 내가 갔던 도시들—시안, 베이징, 실크로드—얘기를 꺼내봤자 크게 공감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지 못했다.
수업을 10분 여 남겨두니 아무것도 집중되지 않았다. 오늘 오후 수업 들은 시간만 여섯 시간이고, 오전에도 계속 학교에 머물렀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돌연히 퐁피두 센터로 향했다. 목요일은 개관시간이 11시까지다. 지난번에 다 관람하지 못한 근대미술 구역을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정규시간이 지난 뒤에는 특별전만 개방된다고 했다. 특별전이라면 저번에 봤던 바젤리츠 전시를 말한다. 할 수 없이 추적추적 비내리는 밤길을 가로질러 다시 버스를 타고 팡테옹으로 되돌아 왔다. 이제는 거대한 석조건물인 팡테옹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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