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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의 일기: 파도 치듯Vᵉ arrondissement de Paris/Février 2022. 2. 16. 00:18
# 종종 일찍 준비를 시작하고서도 예정된 시각에 늦는 경우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아침잠이 많아 아침에 빠듯하게 움직이는 편이긴 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움직였는데도 수업에 늦었다. 원래는 아침 수업이 있을 때 21번 버스를 타고 14구로 이동하지만, 오늘은 부랴부랴 RER을 타고 시테 유니벡시테로 갔다. 걷는 거리가 늘어나긴 해도 지하철이 버스보다는 확실히 빠르기 때문이다.
오늘 부로 두 번째 교수가 수업을 이어 받는 노동경제학 수업은 '실업급여'가 주제였다. 실업급여와 소득대체율의 관계를 설명할 때, 실업급여를 수급할 수 있는 조건으로 적정한 소득수준은 얼마인가, 가 핵심적인 질문이었다.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근로소득 상한액을 초과하여 일을 하는 사람은 근로의욕이 낮아질 수 있다.
하지만 논의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 또한 수업의 핵심이기도 하다. 운용할 수 있는 자산(liquidity)이 적은 저소득층일 수록 실업급여 가입률이 낮기 때문이다. 즉, 실업급여를 수급할 수 있는 기준액 이하로 노동을 하는 상황이어도 보험제도에 가입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런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때문에 실업급여의 적정한 소득대체율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근로의욕을 저해할 수 있다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문제 뿐만 아니라, 노동자 개인의 유동성(liquidity)을 포함한 입체적인 분석이 병행되어야 한다.
#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14구로 넘어오면서 알렉상드르에게서 도착한 메일을 확인했다. 알렉상드르는 결정 이론(Decision Theory)에서 나와 함께 팀 과제를 하게 된 친구다. 결정 이론 수업이 끝난 지난 주 화요일 저녁에 문제를 바로 풀어 메일을 보냈건만 주말까지도 회신이 도착하지 않았다. 프랑스에 온 뒤 이곳 사람들의 사람들의 시간 관념에 대해 거의 내려놓은 상태여서, 팀 과제를 혼자서 해야 하나보다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알렉상드르가 보낸 메일의 첨부파일을 열어보니, 수업에서 다루지 않았던 이론들까지 끌어다가 문제를 너무 열심히 풀어놓았길래 이건 당황스러웠다. 오늘이 과제 마감일인데 오늘에서야 마감시간을 넘겨 회신을 하다니. 열심히 하기는 또 왜 열심히 했는지. 알렉상드르가 과제를 절반 조금 넘게 하고 남은 부분을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점심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과제의 나머지 부분에 매달렸다.
진작 메일을 줬더라면 비슷한 접근방식으로 과제를 하고 제때 제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수업 안에서 다뤘던 이론들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문제 풀이를 한 뒤 교수에게 이미 개인적으로 메일을 보내놓은 상태였다. 알렉상드르가 연락두절 상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팀원이기로 한 친구가 미완성이기는 해도 열심히 준비했으니, 과제의 나머지 부분이라도 내가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예정에도 없던 과제를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풀었다. 알렉상드르가 수업자료 외의 문헌까지 활용했기 때문에, 나도 서둘러서 논리적으로 연결지을 수 있을 만한 이론들을 찾았다. 오전 수업이 11시 전에 끝났는데, 미친 사람처럼 과제를 하고 나니 오후 2시가 되어 있었다.
과제를 하는 동안 12시 반으로 전날 예매해두었던 오르세 미술관 입장은 어느 정도 포기한 상태였다. 확인해보니 일단 구매한 입장권은 환불도 안 된단다. 게다가 오늘은 5시경에 공공재정의 보충수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과제를 우선순위에 두었던 건 프랑스 애들이 이런 방식으로 공부하는구나, 하며 받은 느낌 같은 게 약간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보통 수업 안에서 다뤄진 것들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알렉상드르가 절반 정도 문제를 풀어놓은 걸 보니 교실 밖에 있는 자료들까지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자신의 언어로 풀이한 게 보였다. 밑지는 정도가 아니라 밑독이 빠져도 남은 과제를 보완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다.
# 14구에서 오르세 미술관으로 가는 길은 가깝고도 멀었다. (어쨌든 입장권을 그냥 날리기는 너무 아까워서 한 시간이라도 구경하기로 했다.) 68번 버스가 너무 막혔다. 도착하고 보니 3시였다. 평일 낮인데도 오르세 미술관은 퐁피두 센터에 비해서 사람이 훨씬 붐빈다. 미리 표를 예매했어도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현장 구매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기줄에 서야 하지만, 직원이 검표를 꼼꼼히 하지 않은 덕분(?)에 우선입장할 수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주어진 시간이 적어서 전시실 하나조차도 온전히 둘러보지 못했다.
아치형 건물 아래 수직으로 쾌적하게 개방된 공간을 따라 제각각 늘어선 조각상들만 봐서는 작은 미술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오르세 미술관은 매우(×10) 크다. 나는 얼떨결에 5전시실을 먼저 가게 되었는데, 한 시간 남짓 머무르면서 5전시실 한 군데도 다 둘러보지 못했다. 5전시실은 인상주의 또는 신인상주의 작품들이 전시된 공간으로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폴 세잔, 에드가 드가 등 유명 작가들의 유명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반 고흐의 작품이 전시된 후기 인상주의 전시실은 발도 들여보지 못했으니 오늘 미술관의 10분의 1은 둘러보긴 한 걸까. 파리 시내의 다른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도대체 언제쯤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차피 한 번 방문해서 다 둘러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기왕 늦어진 거 아예 느긋하게 구경하기로 했다. 시간을 재촉한다고 좋은 작품들을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둘러보는 게 더 손해인 것 같았다. 교과서에서 생전 본 적이 없는 작품들 중에서도 시선을 당기는 작품들이 많은데, 이런 작품들을 늘상 가까이서 보는 이곳의 어린 아이들과 젊은 학생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엄청난 혜택을 알고 있으려나, 그저 해맑기만 하다. 작품도 좋지만, 작품들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유럽인’들이 세상과 사물, 사람을 보는 시각이 참 많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래된 동양화에 나타나는 선이나 질감, 색채와는 전혀 다른 방식을 활용한다.
또한 이들의 예술적 성취 이면에는 엄청난 자원 투하가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까지 전해져오는 작품만 보더라도 제국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에 이들 국가는 원료도 풍족했던 것 같고 물자 또한 다채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또 화가들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면 팔레트든 물감이든, 캔버스든 언제든 살 수 있는 도시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이 인정받기까지 물감 하나가 아쉬운 생활고를 겪었더라도 말이다. 한편 에드가 드가의 청동 입상도 다수 전시되어 있는데, 소장하고 있는 작품의 양뿐 아니라 다양성도 엄청난 것 같다고 느꼈다.
# 저녁에는 다시 14구로 돌아와 공공재정 수업을 들었다. 수업에 참석하는 학생이 줄고 줄어서 이제는 다섯 명이지만, 교수는 매우 성의껏 수업을 진행한다. 낮에는 정부 부처에서 온갖 회의에 참석하다가 저녁에 학교에 와서 강의를 하면, 어느 정도 설렁설령 요령껏 하거나 또는 현업에 주로 있어서 가르치는 기술이 부족하거나 할 것 같은데 다양한 예제를 통해서 이해하기 쉽게 가르쳐준다. 또 학생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고, 어떤 질문이라도 찡그리는 표정 하나 없이 진중하게 답변을 하는 모습을 보면 열정과 목적의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멋있어 보인다. EU 내에서 비교가 될 만한 국가들(특히 독일이나 이탈리아)과 비교하여 프랑스의 재정 상황을 설명할 때, 언뜻 언뜻 프랑스 경제에 관해 진정 어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게 보여서 사명감이란 게 있다면 저런 것일까 싶기도 하다.
다만 강의실에 도착하니 나 혼자뿐이었는데, 수업 시간이 조정되면서 일부 불참자가 생긴 탓이었다. 나중에 두 명이 더 합류해서 총 세 명이서 수업을 들었다. 오늘은 경기변동과 구조적 재정수지에 대해서 배웠다. 본인이 부처에서 맡고 있는 주된 업무 영역에 속한다고 소개하면서, 실무에서 어떤 것들이 주로 논의되는지 소개한다. 아침 수업 때도 그랬지만, 아직도 수식이 가득 나오면 겁이 나는데 계산을 어떻게 할 것인지보다는 수식의 배경이 되는 개념과 이론을 얼마나 숙지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2월말쯤 짧은 방학이 시작되면 점점 부하가 걸리고 있는 수업 내용들을 복습해야 한다.
# 어제 소시에테 제네랄에서 내 은행업무를 봐주는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개인정보가 담긴 서류들을 접수하고도 왜 4주째 계좌개설이 감감무소식인 거냐고 설명해달라고 메일을 썼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지만 일처리가 너무 늦어지는 게 불만이었고, 담당자도 달리 할 말이 없었는지 프랑스 사람이 하는 사과를 처음 받아봤다. 메일에 사과하는 표현이 서로 다르게 총 세 번 등장했는데, 'navré'라는 형용사를 처음 알았다. 우리말로 하면 'désolé'와 비슷한 '송구하다' 정도의 뉘앙스가 맞는 것 같다. 오늘 배운 프랑스어를 남기기 위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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