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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의 일기: 비행운Vᵉ arrondissement de Paris/Février 2022. 2. 13. 18:51
겨울철 파리 하늘은 비행운이 참 많이 보인다 # 이민자 2~3세대가 없는 오늘날의 프랑스 사회를 떠올리기는 어렵다. 그만큼 프랑스 본토 바깥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크다. 여기서 이민자 2~3세대라는 건 일반적으로 알제리에서 넘어온 마그레브 지역 사람들이나, 서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을 말한다. 인도나 동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지만, 전자에 비해 비중이 크지 않다. (인도나 동아시아에서 온 ‘학생’은 많이 보았다.)
이들 이민자 2~3세대이 종사하는 직종은 대개 계산원, 청소부, 판매원, 보모, 보안관, 사무보조, 운전기사 등 화이트칼라와는 거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미래에 쉽게 사라질 직업들도 아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보모나 청소부가 하는 일을 기계가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들 이민자 구성원이 없다면 프랑스 사회는 멈춰버릴 것이다. 한 달간 프랑스에 머물며 지켜본 바로는 그렇다.
이들은 나름대로 억양이 다르긴 해도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대입해 상상해보는 것이다. 베트남 사람이나 필리핀 사람들의 후손이 한국에 정착한지 오래되어 서울의 식당과 백화점, 쇼핑몰마다 한국말로 고객을 응대하는 광경. 아무리 인종 개념이 작위적인 것이라고는 하지만 선뜻 그럴듯한 풍경이 상상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풍경에 프랑스 사회는 도달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가 미국처럼 처음부터 이민자를 받아들이며 세워진 나라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들어서 프랑스를 뒤흔든 일련의 테러들과 극우주의의 약진을 보면, 지난 반 세기 동안 프랑스의 이민자 관련 정책이 실패했다고 보아도 무방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4월 대선을 앞둔 어제자 여론조사를 보면 극우성향의 두 후보—마린 르펜(Marine Le Pen)과 에릭 제무르(Eric Zemmour)—에 대한 지지율을 합쳤을 때, 30%가 조금 안 되는 에마뉘엘 마크롱의 지지율을 넘는다.
물론 프랑스는 1차투표에서 과반후보가 나오지 않으면 결선투표를 실시하기 때문에, 확장성이 떨어지는 두 극우성향 후보보다는 오히려 제1야당 후보인 발레리 페크레스(Valérie Pécresse)의 지지율 귀추에 더 주목해야 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난 대선에서 마린 르펜은 결선투표에 가서는 30% 중반밖에 획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출마가 확정된 후보들 가운데 극우후보에게 30%를 상회하는 지지가 견고하게 나온다는 것 자체는 분명 의미가 있다. 이러한 프랑스의 정치지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고 한국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늘을 할퀸 듯한 비행운 자국 Fontaine Guy Lartigue # 오늘 아침에는 무프타흐 시장 초입의 한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프랑스혁명사』를 들고 왔지만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이 카페는 스페셜티 커피를 취급한다고 알려져서 온 곳으로, 프렌치 프레스가 메뉴에 있길래 주문해 보았다. 평소 좋아하기도 하는 향기가 들어가고 산미가 있는 원두로 부탁했다. 굳이 프렌치 프레스를 시킨 건 프렌치 프레스로 내린 커피를 먹어본 적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또 맛이 괜찮다면 프렌치 프레스 도구를 기숙사에 구비해둘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평소 커피를 자주 마시는 데다, 프렌치 프레스는 내리는 방식이 비교적 간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커피 맛이 그냥 그랬던 것 같다.
정오가 되기 전에 카페를 나서서 몽주 광장의 시장으로 향했다. 사실 사야할 것이 이것저것 많았는데 고기와 반찬이라는 두 가지만 일단 머리에 입력하고 길을 나섰다. 몽주 광장은 오늘따라 사람이 정말 많았다. 광장에 들어선 시장에는 정육점이 세 군데 정도 있었는데, 가장 먼저 간 곳에서는 돼지 목살(Épaule de porc)를 찾으니 한가운데 떡하니 굵은 뼈가 들어가 있고 1kg 단위로밖에는 팔지 않는다고 했다. 다음으로 간 정육점에도 돼지 목살을 찾으니 조금 의아해 했는데, 정확히 한국에서 취급하는 목살은 아니지만 목살과 가장 가까운 부위를 주었다. 600g에 8유로면 나쁘지 않은 가격인 것 같다.
La place Monge 점심:D 문제는 뒤이어서 지갑에서 돈이 줄줄 새기 시작했는데, 수제음식을 파는 곳에서 양고기 커리와 조리된 쌀을 샀더니 12유로, 치즈를 파는 곳에서 꺄망베르 치즈와 고다 치즈를 샀더니 18유로가 나갔다. 특히 치즈를 파는 곳(fromagerie)에서는 할머니께서 부탁하지도 않은 달걀 여섯 개를 담아주셨는데, 아무리 봐도 달걀(œuf) 얘기를 서로 꺼낸 적이 없어서 덤으로 주신 건지, 가격을 보자니 값이 포함이 된 건지 모르겠다. 영수증이 없으니 가격에 어떻게 반영이 됐는지도 모른다.
몽주 광장을 빠져나온 다음에는 다시 무프타프 시장골목으로 들어가서 반찬 가게에 갔다. 이탈리아식 반찬을 파는 곳으로 가지(aubergine)와 피망(poivron)으로 된 반찬을 사는 데 13유로가 나갔다. 도합 50유로가 나갔는데, 과연 밖에서 사먹는 것에 비해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게 맞는지 장바구니를 들고 기숙사로 돌아오며 머릿속으로 연신 주판을 튕겨보았다. 그렇게 장을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보니 장보는 데만 장장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만큼 이래저래 신경을 쓰는 건 오늘 수육을 만들어보려는 참이기 때문이다.
여기도 벚꽃이 있다..! 오늘 최고온도가 14도까지 올라갔다고는 하지만 벚꽃이 2월에 벌써 꽃망울을 터뜨렸다 # 몽주광장에서 사온 반(半)조리된 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에는 조깅을 했다. 운동을 하지 않으니 몸이 뻐근한 느낌이 들어서 한 주를 보내고 나니 견디기가 어려웠다. 지난 주 일요일에 뤽상부르 공원을 갔을 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오늘은 코스를 바꿔보기로 했다. 고블랑 대로(Av. des Gobelins)를 출발해 이탈리 광장(Place d’Italie)에서 방썽 오히올 거리(Bd Vincent Auriol)로 꺾는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센 강변으로 내려간다. 파리 식물원이 보이는 지점에서 오삐딸 거리(Bd. de l’Hopital)로 갔다가 두 시 방면의 생마흐셀 거리(Bd Saint-Marcel)를 달리다보면 출발지점이 보일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직사각형에 가까운 궤적이 나온다. 공원처럼 조깅코스가 깔끔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파리에서는 그냥 사람들이 도로에서도 조깅하는 모습을 많이 봐서 개의치 않고 달려보기로 했다.
6km 35분. 뤽상부르 공원 코스와 다른 점이라면 구간에 따라 완만하게 경사가 있다는 점이다. 고블랑 대로는 완만한 오르막길이었고, 반면에 방썽 오히올 거리는 완만한 내리막길이었다. 센 강변을 조깅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있었지만, 막상 아우스터리츠 다리에 이르는 강둑길은 대체로 건물 아래 필로티가 이어진 구간이 많아서 기대한 만큼 자연적인 경치를 즐기기는 어려웠다.
원래 계획했던 코스와 다른 점이라면, 즉흥적으로 파리 식물원을 한 바퀴 돌았다는 점이다. 파리 식물원은 처음 가보는데 뤽상부르 공원만한 면적으로 매우 쾌적하고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많았다. 계획한 코스에 파리 식물원까지 달리고 나니 몸 전체가 땀범벅이 되었다. 기숙사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바람이 거세서 춥다고 느꼈는데 이제는 열기가 느껴졌다. 돌아오는 길에 약국에서 마스크도 한 박스 샀다. 이곳에서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아니면 얇은 마스크들을 쓰는데, 일단은 두꺼운 것으로 샀다. 그 동안 프랑스 코로나 상황이 좋지 않아서 마스크를 자주 갈아 썼었는데, 조금 아껴서 써야겠다.
재료는 아끼지 않고 듬뿍 # 샤워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수육을 만들기 시작했다. 오후 4시쯤이었다. 특히나 주말에는 공용주방을 쓰려는 학생들이 많아서 1~3시, 7~9시는 피하는 게 좋다. 특히나 수육처럼 시간이 많이 걸리는 요리라면 더더욱. 양파와 마늘, 대파, 통후추를 넣고 잡내를 제거할 된장도 듬뿍 넣었다. 여기는 수육 개념이 없다보니 고기가 수육에 알맞게 잘려져 나오지 않아서 간단히 손질을 하고도 혹시 몰라서 조금 길게 끓였다. 강불에 40분, 중약불에 50분 정도. 수육을 익히는 동안 게임이론 과제를 하지만 집중이 잘 될 리 없다. 계속 주방을 왔다갔다 하며 살피다가 6시쯤 요리를 마무리하고, 용기에 옮겨 담았다. 조금은 비장(?)한 마음으로 이번 주의 식량을 챙기는 군인처럼 돼지고기를 용기에 담고, 향이 달아나지 않도록 함께 끓였던 야채와 육수도 꾹꾹 넣는다.
Fontaine des Innocents 에펠탑은 매시 정각마다 5분간 찰랑찰랑 반짝인다 # 요리를 마치고서는 퐁피두 센터에 갔다. 6시면 저녁을 먹기에는 이르고 게임 이론 과제를 더 하고 싶진 않았다. 얼추 다 하기는 했지만 같이 과제를 해야 할 프랑스 학생과 연락이 닿지 않아서 신경이 쓰이고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버스가 아닌 RER로 샤틀레-레 알 역에 내려 마흐게히트 드 나바흐 광장(Place Margerite-de-Navarre)으로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비스트로와 브라세리, 레스토랑마다 사람으로 넘친다.
퐁피두 센터에 도착해 표를 끊으면서 학생 할인이 없냐고 물었더니 학생증을 보여달라고선 무료로 표를 주었다. 내가 알기론 26세 미만이더라도 EU학생만 무료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중에 염치 불구하고 매표소가 아닌 전시실 직원에게 오늘 왜 무료로 볼 수 있었던 거냐고, 주중에도 학생 자격으로 입장하면 무료인지, 모든 시민에게 무료 개방인 게 매달 첫 일요일만 해당되는 게 아닌지 물었다.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그대로 직원도 설명하기는 하는데, 이미 내 손에 쥔 무료 티켓을 보고서는 그냥 입장해도 된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오늘 왜 무료로 볼 수 있었던 건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고,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전시실을 구경했다.
YSL YSL 퐁피두 센터는 처음 왔을 때보다 두 번째로 와보니 더욱 좋았다. 지난 번에 보다가 만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의 추상화와 달리와 미로의 초현실주의 구간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 전시는 너무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 존 케이지의 실험적인 음악까지도 전시실 한켠에 마련되어 있다. 백남준의 작품도 보이고, 확 마음을 끄는 작품이다 싶었더니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을 전시한 공간도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는데, 오늘은 5층을 보고 나니 이번에는 4층을 둘러볼 시간이 남지 않았다.
4층을 잠깐 둘러보기는 했다. 특별전시 공간으로 기획된 곳으로, 의외로 오늘 전시 중에 건축가 폴 넬슨(Paul Nelson)에 관해 소개한 소규모 특별전시 공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폴 넬슨은 르 코르뷔지에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건축가로 여러 건축물들을 남겼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나라에 있는 근현대식 건축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릴 종합병원(Cité hospitalière)의 사진을 보는 순간, 자동적으로 떠오른 게 혜화동의 서울대병원이었다. 그러고보면 근현대식 건축에 있어서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건축가들의 영향이 지대했구나 하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앞선 구상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런 지점들에서 모방하기 어려운 프랑스의 저력이 느껴지는 것 같다. 특히나 여기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부지런하고 치열하지도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 사람들 이렇게 허술해도 되나 느끼다가도 기가 막히게 잘하는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잘하는 것들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가치를 만들어낸다. 오늘 둘러보았던 5층 전시실에는 작품 컨셉에 알맞는 입생로랑(Yves Saint Laurent)의 의상을 곳곳에 배치해 놓았다. 1차원적인 미술품과 입체적인 옷을 병치시킨다는 발상도 참 재미있지만, 그만큼 소개할 만한 문화적 아이템이 풍부하다는 게 부럽기도 하다.
프랑스 문화의 강점이라면 겉으로 드러나는 표상 아래에 흐르는 서사가 굉장히 풍부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L과 V를 겹쳐놓은 아주 단순한 로고에 사람들은 열광하지만, 이렇게 두문자 두 개를 겹쳐 로고로 활용하는 역사적인 공간은 파리 시내에 흔하다. 1구를 가든, 14구를 가든 아주 오래된 건물들마다 철문에 알파벳 두 개를 겹쳐놓은 문장(紋章)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언뜻 보아도 모두 100년은 거뜬히 되는 건축물들이다.
YSL YSL 하지만 이런 프랑스 문화의 강점이 단순히 오래된 것을 잘 가꾸는 데에서 비롯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프랑스 사람들이 오래된 것들을 잘 가꾸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 조깅을 하면서 달렸던 방썽 오히올 거리는 파리 메트로 6호선이 지상으로 달리는 구간이다. 자연히 철로 옆을 따라 뛰게 되는데, 철로를 아르누보 양식의 철제 필로티가 지탱하고 있다. 육중한 콘크리트 교각에 비해 삭막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낡은 느낌은 있을지언정 주변 경관에 어우러진다.
다만 어째서 오래된 것들을 가꿀 수 있는 건지에 대해서는 궁금증이 든다. 오래된 것들을 가꾼다는 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것에 더디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강점은 반작용에 의해 상쇄될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여러 비효율적인 업무들을 접하게 된다. 단순행정, 통신, 교통에 이르기까지 속터지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곳 사회가 앞으로 굴러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가끔은 정말 궁금해진다.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궁금해진다. 이는 여기서 지내는 동안 계속 관찰할 일이다. 일단은 다음 번에 퐁피두 센터를 한 번 더 와서 4층 전시실도 둘러봐야 한다. 둘러보는 데에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폴 넬슨의 특별전시를 끝으로 전시장이 문을 닫는 시간이 되어 퐁피두 센터를 나왔다.
비주얼은 족발(;;)이지만 일단 맛은 싱크로율 120%인 것에 만족! 이번 주 맛있게 먹어야겠다:) 'Vᵉ arrondissement de Paris > Févri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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