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7일의 일기: 증명의 연속

Bâtiment Lhomond

 

                    # 어제 일찍 잠이 들었더니 아침에 일찍 눈을 떴다. 내 방은 학교가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다. 밖을 보면 학교의 중앙 현관은 24시간 불이 켜져 있고 새벽시간을 제외하면 늘상 학생들이 왕래한다. 밖을 내다보니 아직 어둑어둑한데 운동복 차림의 여학생 두 명이 경쾌하게 중앙 현관을 나선다. 아마 체육 동아리에 속해 있거나, 서로 약속을 잡아 이른 아침부터 조깅을 하는 것 같다. 파리에는 특히나 오전에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나도 세면을 한 다음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서는 매주 실시되는 퀴즈를 위해 지난 주 읽어두었던 논문들을 다시 한 번 읽었다.

 

Rue de Pot de Fer

 

                    # 어제 파리 우안 일대를 걸으면서 느낀 거지만, 파리 시내를 오가다보면 거대한 시간 속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에펠탑처럼 벨 에포크에 지어진 건물도 있지만, 개선문처럼 나폴레옹 시대에 지어진 건물도 있고, 루이 14세 치하에서 지어지기 시작한 루브르궁, 중세에 지어진 노트르담 대성당까지 거대한 연대기(年代記)가 통째로 도시에 담겨 있는 것 같다. 

 

                    또 몽마르트를 가면 피카소가 활동했던 아틀리에가 남아 있고, 생제르망 거리에는 헤밍웨이가 드나들었던 카페가 있다. 뻬흐 라셰즈 묘지를 가면 프루스트가 잠들어 있는 장소가 나오고, 샹젤리제 거리를 가면 <네 멋대로 해라>의 무대가 되었던 낯익은 장소들이 나온다. 노트르담 다리에 가면 『레미제라블』의 자베르가 강물에 몸을 던진 장소가 나오는가 하면, 코메디 프랑세즈에서는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일정이 빼곡하게 차 있다. 어디를 걷든 이야기와 시간의 농도가 진하게 느껴진다.

 

Rue de l'Épée de Bois

 

                    # 오늘은 오후 한 시부터 저녁 여덟 시까지 수업이 꽉 차 있었다. 오후 다섯 시에서 여섯 시까지 잠시 시간이 비어 몽주 약국에서 바디워시를 사고, 빵(Flan Nature)을 사먹은 게 전부다. 한국에서 떠나기 전 한 학기 파리에서 공부하게 되었다고 하면, ‘파리’라는 말만 듣고 부럽다거나 쉬다 오겠다는 말을 듣곤 했었고, 무의식중에 그런 생활을 하게 되는 건가,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읽어야 할 논문도, 발표도, 과제도 매우 많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분주히 시간을 보낸다. 게다가 사소한 행정문제를 처리하다보면 하루가 꽉 차버린다.

 

La poste

 

                    오늘 문화인류학 수업은 사회적 학습(Social Learning)에 대한 주제를 다뤘고, ‘진짜 모방(True imitation)’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의했다. 오늘부터 개인발표가 시작되는데, 길지 않은 발표이기는 했지만 첫 학생의 발표가 매우 뛰어났다. 한국인의 본능상 누군가와 비교되는 상황부터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생각이 복잡해졌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사회과학이라고는 하지만 평소 잘 알고 있지 않던 문화인류학 분야에서. 그나마 내 관심분야와 접점을 찾을 수 있을 만한 ‘협동’ 문제를 발표주제로 고르기는 했지만 이래저래 걱정이 앞선다. 모든 수업이 토론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발표를 마친 뒤 질의응답이 이어지는데, 프랑스 억양이 강한 프랑스어를 놓칠까봐 걱정이 되기도 한다.

 

Rue Mouffetard

 

                    일단 오늘 모든 일정은 끝났고 금요일은 그나마 일정이 적은 편이다. 사실 요즘은 이곳도 교내 축제 기간으로, 다음주부터 시작되는 짧은 바캉스 기간을 전후로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는 것 같다. 오늘과 내일은 날짜를 넘기면서 진행되는 밤샘 공연도 있다. 얼마 전에는 작은 연극들이 상연되어서, 행사가 끝나는 시각이 되면 학교 앞에 학생들이 쾌활하게 대화하는 소리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아직 동아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데, 좀 더 여유가 생긴다면 이런저런 행사들에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l'Amour au Pouvoi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