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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8일의 일기: 몰리에르Vᵉ arrondissement de Paris/Février 2022. 2. 18. 19:38
# 오늘 아침은 로라(L)와 예정된 약속이 있었다. 아침 열 시 로비(l'Aqua)에서 만나 에흐네스 정원으로 이동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L은 한국어를 배우는 이곳 학생으로 학교를 통해 알게 되었고 자유롭게 언어 교환을 하기로 했다. L은 이곳에서는 문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처음 한글을 알게 되면서 한국어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곳에서 두어 개 한국어 강의가 개설되기는 하지만,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학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조금 신기했었다. 아무래도 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 아직까지 중국이나 일본부터 떠올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어 수업이나 일본어 수업은 다른 유럽언어들과 비슷한 비중으로 강의가 개설된다.
한글은 배우는 게 매우 쉽지만 한국어는 그렇지가 않다. L과 프랑스어와 한국어를 병행해가면서 이야기하는데, 한국어를 배우며 접하는 어려움을 알 것 같기도 하다. 가령 ‘간다’라는 표현을 말로 뱉을 때는, 가요, 갑니다, 가는데요, 가고요 등등으로 현재형 안에서도 다양한 변화가 가능하다. 또한 L은 한국어는 모든 문장이 길어서 힘들다는데 아직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2음절 짜리 ‘je vais’라는 표현이 ‘나는 갑니다’의 5음절로 바뀌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로라가 문학을 공부하므로 이야기를 쉽게 풀어나가가 위해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묻자 로라는 장 콕토를 이야기했다. 『엉펑 테리블(Enfant terrible)』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오전부터 비가 왔기 때문에 에흐네스 정원에서 카페테리아로 자리를 옮겨 한 시간 반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 오늘은 파리의 대중교통을 맡고 있는 RATP에서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다. RER를 비롯해 메트로의 많은 노선들이 아예 운행을 하지 않거나, 운행을 하더라도 평소 배차간격의 3분의 1로 줄이는 방식으로 하루 동안 시위가 이뤄졌다. 때문에 금요일 수업들은 강의실에 도착하기 어려운 교수들로 인해 불가피하게 차질이 빚어졌다. 사실 대중교통이 없으면 차를 타고 이동하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든 오늘 오후에 있을 프랑스어 문법 수업은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되었다. 비대면 수업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고, 어제부터 아무 생각 없이 잠이나 자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으므로 수업이 예정되어 있던 시간에 두 시간 동안 낮잠을 잤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잔 것 같다. 대신 선생님께 사과 인사를 하며 오늘까지 제출해야 했던 작문 과제를 메일로 제출했다.
# 낮잠을 잔 뒤 늦은 오후에는 논문을 조금 읽다가 루브르 지역으로 넘어갔다. 원래 마레 지역을 좀 쏘다니다가 루브르 지역으로 넘어가고 싶었지만, 북부 마레 지역으로 데려다줄 11호선이 아예 운행중단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냥 일찌감치 루브르 지역으로 갔다. 오늘은 코메디 프랑세즈에 몰리에르의 『인간혐오자(le misanthrope)』를 예매해 두었다. 올해는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으로 코메디 프랑세즈에서는 상반기 내내 몰리에르의 작품들을 총망라하여 상연하거나, 몰리에르를 주제로 한 창작극들을 선보인다. 상반기에 걸쳐 진행되기 때문에 상연 회차가 꽤 많은 편임에도 매진된 공연이 많아서 어렵게 예매를 했다.
Alceste: Il est vrai : ma raison me le dit chaque jour ; Mais la raison n’est pas ce qui règle l’amour.
« Le cœur a ses raisons que la raison ne connait point. » (Pascal, Pensées, fragment 397)
Philinte : La parfaite raison fuit toute extrémité, Et veut que l’on soit sage avec sobiriété.
« Ne soyez pas plus sage qu’il ne faut, mais soyez sobrement sages. » (Montaigne, Les Essais, I, 30)
『인간혐오자』는 지난 학기 프랑스어 수업을 청강하면서 짤막하게 다뤘던 작품이기도 하다. 로라에게 오늘 몰리에르의 『인간혐오자』를 보려고 한다고 말했더니, 본인은 락다운(confinement) 기간 동안에 컴퓨터로 상영되는 『인간혐오자』를 시청했다고 말했었다. 그만큼 몰리에르의 작품들은 프랑스인들에게 친숙한 작품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봉쇄’를 가리키는 한국어를 쓸 일이 많을 것 같아 궁금하다는 로라에게 답변을 해주면서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봉쇄'라는 말을 쓸 일은 잘 없지만, 팬데믹이 우리가 상황을 바라보는 눈까지 바꿔놓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인간혐오자』는 중간의 짤막한 휴식을 두고 총 세 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아무래도 프랑스어가 익숙치 않다보니 작품도 작품이지만 주인공들의 대사 자체에 더 집중을 했었다. 극의 주인공인 알세스트(Alceste)와 셀리멘느(Célimène)가 중심을 이루며, 굉장히 극적으로 진행된다. 특히 인간의 위선에 대해 고뇌하는 알세스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미장센도 각별히 신경을 쓴 것 같고 연극에 삽입된 피아노 연주곡도 좋지만, 배우들의 실감나는 연기가 참 좋았다. 영화와 비교하면 연극은 완벽한 복제가 어렵다. 그만큼 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현장감과 시간감각이 전달되는 것 같다.
공연이 저녁 여덟 시 반에 시작되었으므로, 공연이 끝나고 코메디 프랑세스를 나서고보니 이미 밤 열한 시 반을 넘겨 있었다. 파업 때문인지 콩나물 시루가 된 21번 버스를 타고 라탕 지역 방면으로 되돌아온다. 버스가 너무 답답해서 종착지에 이르기 전에 뤽상부르 공원에서 하차했다. 코메디 프랑세즈를 메운 장중한 긴장감에 잠겨 있다가, 밤공기를 쐬니 추위를 느끼면서도 상쾌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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