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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마이클 샌델/와이즈베리> &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와이즈베리>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경제학자들은 시장은 교환되는 재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시장은 흔적을 남긴다. 때때로 시장가치는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비시장가치를 밀어내기도 한다."
"부패라고 하면 흔히들 부정 이득을 연상한다. 하지만 부패는 뇌물이나 불법 거래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어떤 재화나 사회 관행을 부패시키는 행위는 그 평판을 깎아내리는 행위고, 가치를 합당한 수준보다 낮게 평가하는 행위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시민에게 공동체적 생활을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려면 배경/사회적 위치/태도/신념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매일 생활하며 서로 부딪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의 차이를 견뎌내고 이를 놓고 협상하고 공공선에 관심을 쏟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따라서 결국 시장의 문제는 사실상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싶은가에 관한 문제다. 모든 것을 사고팔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도덕적/시민적 재화는 존재하는가?"
뒷북이지만 이제 와서 마이클 샌델의 책들을 읽었다. 아마 '정의 신드롬'이 일었던 게 2011년에서 2012년으로 넘어가던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는 졸업학기라 당시에는 아예 책을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먼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먼저 읽은 뒤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는데, 순서는 상관없이 읽어도 되는 책들이지만 '시장'에 관한 이슈를 먼저 접한 뒤 '정의'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고민할 수 있어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먼저 읽은 것도 나름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금전적/산술적으로 환산하려는 시도가 만연한 이 시대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누구나 공감할 만한 주제를 제대로 건드리는 책이었다.
예를 들어, 책 속에서도 언급되듯 '생명보험'이 최초로 도입될 당시에는 도덕적으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사회적인 저항이 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산업보험이나 화재보험도 아닌 사람의 목숨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는 생명보험에 대해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하나의 신성불가침 영역이 된 '시장 논리'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시장 논리는 여전히 존재하기는 한다. 우리는 '암표 거래'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 '성 상품화'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시장이 바람직하게 작동하고 있는가?" 또는 "시장이 도덕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잣대로 마이클 샌델은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한다.
1. 경쟁의 공정성/평등
2. 부패 여부/도덕적 가치 훼손 여부
첫 번째 잣대(경쟁의 공정성/평등)와 관련하여 저자는 시장 영역에 포섭되고 있는 다양한 유형의 '새치기'를 언급한다. '암표 거래', '병원진료 예약권의 암거래' 그밖의 '우선권'이라는 미명아래 제공되는 각종 서비스들은 형식상 개인간의 자유로운 의사 합치에 의해 성립된 교환이라고 할지라도, 실질적 의미에서 사회 구성원의 평등을 보장한다고 보기 어려운 거래다.
두 번째 잣대(부패 여부/도덕적 가치 훼손)에 대해 저자는 인센티브, 생명에 대한 금전적 평가, 명명권과 관련된 여러 사례들을 동원하여 관련 개념을 자세히 설명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는 이스라엘의 한 유치원에서 벌금제를 도입한 실험사례였는데, 방과후 아이를 늦게 데려오는 부모에게 일정 금액의 벌금을 매겼더니, 아이를 시간 안에 찾으러 오는 부모가 줄기는 커녕 오히려 더 늘더라는 것이었다. 부모는 아이를 제 시간에 데려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차라리 벌금을 지불함으로써 도덕적 의무를 다했다는 위안을 얻었고, 결과적으로 도덕적 해이가 증가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시장과 비(非)시장, 또는 시장과 비시장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워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한 영역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마이클 샌델이 제시한 두 가지 잣대는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 정의란 무엇인가
"이성적 존재는 자신을 주시할 수 있는 관점과 자신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알 수 있는 두 가지 관점을 갖고 있다. 우선 자신이 감각적 세계에 속해 있는 한, 자신이 자연법칙(타율) 아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신이 예지적 세계에 속해 있는 한, 자연법칙과는 독립적인, 경험이 아닌 오직 이성을 토대로 한 법 아래에 있음을 알고 있다." - 임마누엘 칸트
"선천적 재능의 분배나 사회적 여건의 우연성은 부당하기 때문에 제도상의 질서는 항상 결함이 있다는 주장을 우리는 거부해야 하며, 부정의는 반드시 인간의 손으로 조정해야 한다. 물론 때때로 그런 생각이 부정의를 무시하는 변명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마치 부정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해서 다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식의 말처럼 말이다. 자연의 배분 방식은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다. 인간이 특정한 사회적 위치를 갖고 태어나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자연적인 사실일 뿐이다. 정의냐 부정의냐는 제도가 그러한 사실들을 다루는 방식으로부터 생겨난다." - 존 롤스
"고립된 사람(이미 홀로 자족하여 정치 결사체의 이익을 나눌 수 없거나 그런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폴리스의 일부가 아니며, 따라서 그는 분명 짐승 아니면 신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워낙 문외한인지라 자유, 정의, 선(善)에 관해 보다 형이상학적인 논의가 다뤄지는 <정의란 무엇인가>는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책이었다. 마이클 샌델의 논의는 여전히 힘있고 설득력이 있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선'에 대해 언급한 뒤, '공공선'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저자의 입장이 나오는 대목에서는 솔직히 말해 확 와닿는 느낌이 없었다. 전혀 공감하기 어려웠다기보다도 좀 더 구체적인 논거가 뒷받침되었다면, 그가 역설하는 '대안'이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해 저자의 다른 저술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이 책만 놓고 보자면 좀 붕 뜬 상태에서 논의가 끝난 느낌이 들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저자는 크게 네 가지의 접근법을 제시함으로써 읽는이로 하여금 정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할 시간을 준 뒤, 저자의 '정의관'을 끝으로 논의를 매듭짓는다. 소개된 네 가지 접근법은 다음과 같다.
1. 최대 행복 원칙 : 공리주의(제러미 벤담/존 스튜어트 밀)
2. 동기를 중시하는 시각 : 임마누엘 칸트
3. 평등을 강조하는 시각 : 존 롤스
4. 정의와 도덕적 자격 : 아리스토텔레스
구구절절 각각의 접근법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다만 마지막으로 소개한 철학적 관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이고, 바로 뒤이어 저자의 정의관을 소개하고 있는 서사 구조에서 가늠할 수 있듯, 저자의 정의관은 매우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즉, 오늘날 '좋은 삶'이라는 것은 공동체 차원의 연대, 충성, 영예와 미덕을 통해 달성할 수 있으며,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가치들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 저자의 논지다.
위 가치들이 그 동안 도외시되어 왔다는 것에 적극 공감한다. 그러나 뭔..가 아쉬운 생각이 들었는데, 정리를 해보자면 크게 두 가지로 아쉬움을 느낀 원인을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막 급하게 생각을 정리하느라 두서없을 수도 있다.
"첫째, '공동체', '충성심' 등의 개념이 막연하다."
마지막 몇 챕터에서 짧게 다뤄지기에는 보다 구체적인 서술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소개된 철학자들의 논리에도 일부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쾌락의 질적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제러미 벤덤, 쾌락의 질적 가치를 고려함으로써 공리주의의 전제 자체를 약화시킨 존 스튜어트 밀, 보편적 '정언 명령'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에게 과도한 도덕적 굴레(? 너무 과격한 표현일까)를 씌운 칸트에 이르기까지..이들의 논의에는 보완적 논의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들이 내세운 개념과 논리 전개는 명료하다. 그들의 철학이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영감을 얻은 마이클 샌델의 논의가 견고하지 않다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 관념에서 다시 한 번 의문을 느끼는 것은, 둘째, 오늘날의 사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꽃피운 '폴리스' 시대와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공동체'라든가 '충성심'이라든가 하는 가치들이 직관적으로 봤을 때, 매우 소중한 가치라는 건 알 것 같다. 특히나 어릴 적 도덕책에서 수도 없이 접했던 '우리 고유의 공동체 문화'라는 것이 과연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잘 계승되고 있는지, 우리나라에 '정(情)'이라는 게 하나의 문화라고 특정지을 만큼 구성원간에 공유되고 있는지 생각해봤을 때 개인적으로 회의적이다. 그런 면에서 '공동체'나 '충성심'이라는 가치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우리가 사는 시대는 다르다. 공동체의 경계가 뚜렷하고 시민과 비(非)시민의 구별이 분명했던 아테네 때와는 사회가 양적/질적으로 달라졌다. 현대국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대해졌고, 무수히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구성원들이 연결되어 있다.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관료체제, 입법활동, 사법절차는 정교하게 전문화되었고, 아테네 시대 이후 비약적인 기술발전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직역이 출현하였다. 다양한 가치가 충돌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아테네는 철저한 계급 피라미드에 따라 운영된 체제였다. 이에 대해 마이클 샌델은 계급구조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관하여 변론을 펼치지만, 그렇다고 아테네의 폴리스 체제와 오늘날의 국민국가(Nation-State) 체제간의 차이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곡된 공동체주의가 혈연/지연 문제나 님비/핌피 문제로 비화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설익은 공동체주의가 구성원들의 이기적 욕구와 결합됐을 때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비판에 대해 마이클 샌델이 어떤 답변을 할지 궁금하다. 적은 인구가 고도로 밀집되었던 폴리스에서는 동질적인 집단의 목표를 설정하고 추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중에는 도편추방제를 도입해야 했을 만큼 작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데에도 부패방지를 위한 새로운 절차의 도입이 필요했던 걸 보면 국가의 공공선(善)을 달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사회구성원이 모두 '시민의식'을 갖고 영예롭게 '단합된 모습'을 표출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관련하여 보다 디테일한 논의가 필요한 것 같다. 물론 이에 대한 논의도 충분히 진행됐을 수도 있겠지만(이미 많이 진행됐을 것이다..), 철학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내가 모르고 있는 부분이 분명 더 많을 것이다.
마이클 샌델이 강조하는 가치들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공공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시의적절하다는 데 동의한다.
아무래도 그의 대표 저서 달랑 두 권을 읽고 그의 논리에 대해 왈가왈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회가 닿는다면 그의 저서를 더 찾아 읽든지, 관련 철학 서적을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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