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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일상/book 2022. 11. 11. 23:25
……본래 하비히츠부르크는 매와 무관했을 것이고, 대신에 얕은 여울이나 항구를 가리키는 독일어인 Hafen과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은 조상의 뿌리를 기억하는 일이 유행하던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나타났고, 실러의 유명한 역사 담시 「합스부르크 백작」에 힘입어 널리 통용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생물학적 행운과 또 다른 포틴브라스 효과의 순간을 만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생존이 전부인 때에 누가 승리를 이야기하는가?”라고 물었다. 초창기 합스부르크 가문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생존이었다.
……당초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를 통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몰랐겠지만,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통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원래는 “동쪽 영역”이라고 불리던 오스트리아의 초창기 통치자들은 바벤베르크 가문 소속이었다.
—p. 37, 44~45, 67
……신성 로마 제국은 기껏해야 과도한 폭력을 제어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치안 기관으로 남았다. 대영주들과 제후들이 그들의 영토 안에서 이전처럼 권력을 행사했다. 광범위한 영지를 보유한 합스부르크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페르디난트는 일률적인 통치를 강요할 수 없었고, 종교적 일치성도 강제할 수 없었다. 그가 다스린 땅과 왕국들에는 강력한 귀족 세력과 사사건건 방해하는 의회, 시끄럽고 개신교를 믿는 다수파가 버티고 있었다.
……이 2점의 그림에서 티치아노는 중앙 유럽계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톨릭 신앙에 취한 서로 다른 접근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전자는 평화와 타협이라는 선물을 들고 오는 반면, 후자는 이제 막 레판토에서 승리를 거둔 호전적인 스페인의 칼을 가지고 온다.
—p. 106, 143, 175
……유럽의 형세는 이미 바뀌고 있었고, 가톨릭교와 개신교 간의 대결은 장기간 지연될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종교적 타협과 화해에 달려 있는 중앙 유럽식 해법과 불관용과 배타성을 지향하는 스페인식 해법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뿐이었다. 루돌프는 양극단 사이에서 꾸물대며 연금술적 상상 속의 자웅동체만큼 무익한 정치를 마법으로 불러냈다.
보헤미아 반란은 30년 전쟁(1618~1648)의 초기 국면을 장식했다. ……전투는 대부분 신성 로마 제국에서 일어났지만, 저지대 국가, 영국, 덴마크,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이탈리아 북부, 스웨덴, 폴란드 등지로 번졌고, 심지어 폴란드와 스웨덴을 거쳐 저 멀리 떨어진 러시아에도 영향을 주었다.
……30년 전쟁은 세계적 규모의 투쟁이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목적은 약탈 자체이기도 했지만, 당대의 어느 박식한 관찰자가 말했듯이 스페인으로 흘러들어가는 부를 차단함으로써 “우리 목구멍에서 스페인 왕의 팔을 빼내고, 그가 유럽에서 전쟁을 계속하며 쓰는 힘줄을 끊어버리는 것”이기도 했다.
—p. 189, 222~223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계기로 신성 로마 제국의 불분명한 정체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공법학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해서,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이 군주국인지, 귀족정 국가인지, 독자적 주권을 가진 여러 부분들로 구성된 공동의 조직체인지, 아니면 아예 분류 자체가 불가능한 어떤 것, 어느 영향력 있는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비정상적이고 괴상한 것”인지 깊이 고민했다.
……절대주의는 1789년 이전에 프랑스에서 시행된 군주제 형태를 표현하고자 프랑스 혁명 이후에 고안된 용어이지만, “절대적(absolute)”이라는 형용사의 어원은 중세로 올라간다. “풀려난(absolved)”이라는 뜻의 라틴어 압솔루투스(absolutus)에서 유래한 이 형용사는 주로 법적인 의미를 띠고 있었고, 법적 제약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권력을 가리킬 때 쓰였다.
—p. 238~239, 263
……계몽주의는 단일한 현상이 아니었고, 장소에 따라서 다른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과 북아메리카에서 계몽주의는 국민 주권의 확대와 통치권 제한 쪽으로, 개인의 자유와 시민 권리의 보장을 목표로 삼은 새로운 “자유의 과학” 쪽으로 기울었다. 그런데 중앙 유럽에서 계몽주의는 규제를, “국가의 과학”이나 “질서의 과학”을, 그리고 주권자가 규정하는 공익에 개인이 종속된 상태를 지향했다.
……1814년 11월부터 1815년 7월까지 빈에서 열린 대규모 국제회의로 유럽의 지도가 수정되었다. 다른 나라들도 장기간의 전쟁을 치열하게 벌였지만, 그 회의는 결국 모든 면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권력이 정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프랑스가 응징을 당하지 않은 채 1972년의 국경선으로 회귀했고, 작센이 프로이센에 제물로 바쳐졌다는 점도 중요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복원되지 못했지만, 오스트리아 영지를 포함하는 독일 연방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주도권 아래 신성 로마 제국의 자리를 대신했다.
—p. 319, 370~371
메테르니히는 표리부동한 태도를 적절히 활용했다. 해외에 파견된 대사들과 연락할 때면 그는 3종의 서신을 보내고는 했다. 첫 번째 편지에는 정책적 방침이 담겨 있었고, 두 번째에는 그것을 드러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가, 세 번째에는 진짜 정책이 담겨 있었다. ……메테르니히의 진정한 목적은 특히 독일 연방과 이탈리아와 관련하여 주군인 프란츠 2세의 영향력과 신생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1814년과 1815년 사이에 빈에서 메테르니히가 구획 과정에 참여한 뒤에 보전하려고 애쓴 국경선은 유럽 국가 체제의 광범위한 윤곽선을 이루면서 1914년까지 유지되었다. ……1700년부터 1790년까지는 몇몇 혹은 여러 강대국들이 연루된 대규모의 전쟁이 최소 열여섯 차례나 발발한 반면, 1815년부터 1914년까지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은 네 번뿐이었고, 그 네 차례의 전쟁 모두 단기간에 끝났다.
—p. 372, 383~384
……수십 년 전부터, 법치, 언론의 자유, 정치적 대표성, 시민의 권리 따위를 강조하는 여러 가지 자유주의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민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민족이라는 개념은 주로 언어에, 그리고 그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종교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붕괴할 우려가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독일어 사용 지역은 신생 독일에 가담할 듯했다. 보헤미아는 신생 슬라브 국가의 핵심이 되었고, 롬바르도-베네토 왕국은 피에몬테 왕국에 통합될 것 같았다. ……다시 폭력 사태가 벌어진 그해 5월, 황실은 수도를 떠나 인스부르크로 향했다.
1863년까지도 프란츠 요제프는 여전히 독일 황제의 관을 쓰고 싶어했다. 그러나 프로이센도 독일 연방의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야심이 있었고, 실제로 독일 연방의 프로이센 대사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그 야심을 강하게 피력한 바 있었다.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할 가장 좋은 첫 번째 구실을 잡고, 독일 연방을 해체하고, 소국들을 정복하여 프로이센의 주도권 아래 독일의 국민 통합을 이룰 것입니다. 나는 여왕님의 장관들에게 이 말을 하려고 여기 왔습니다.”
—p. 389~390, 415
군주들은 최초의 근대적 유명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구경거리였다. 그들의 이미지는 사진과 대량 생산된 판화를 통해서 “과장된” 속성을 띤 상품으로 변모했다. 그들의 죽음 역시 일상과는 동떨어진 일, 생활 속에 의미와 강렬함을 주는 사건이 되었다. 1867년 막시밀리안의 죽음은 유럽 전역에서 잇달아 발생할 주권자 암살 사건의 예고편이었다.
……민족 정체성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결정의 문제였다. 코슈트는 어머니가 독일인이었지만, 본인은 헝가리인이기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의 삼촌은 슬로바키아의 유명한 애국자가 되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정체성을 받아들일 만한 명백한 근거가 있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정체성은 이웃과 부모, 친구들과 학교 교사들에 의해서 각인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부와 관료 사회도 개입했다.
……민족주의 정치인들의 목표는 제국을 방패막이로 삼는 한편 자기 민족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제국을 교모하게 이용하는 것이었다. 반면 프란츠 요제프와 장관들의 과제는 충성심을 유발하는 일체감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1920년대에 소설과 로베르트 무질은 제국에 의미를 부여하는 관념을 필사적으로 추구한 이른바 평행선 운동을 묘사한 작품에서 정부의 노력을 조롱했다.
—p. 437, 441, 447
1917년 4월, 미국이 참전했다. 애초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무너트릴 의도가 없었다. ……영국의 외무 장관 로이드조지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해체는 “우리 전쟁 목표의 일부분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제국을 독일로부터 떼어놓을 가망이 희박해지자 연합국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거의 껍데기만 남았다. 11월 11일, 카를 황제는 공무 참여를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그 직후,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자 카를 레너가 쇤브룬 궁전에서 카를 황제를 만나 “합스부르크 씨, 택시가 기다립니다”라고 말하며 카를 황제의 망명을 재촉했다.
……러시아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유럽의 대다수 국가의 역사에서 1918년은 책의 한 부분의 마지막을 가리킨다. 반면,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1918년은 책 전체의 마지막이다.
—p. 505, 507, 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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