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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내 목숨 열개와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백수, 젊고 아름다운 그 아이의 죽음은 그 부당한 의심에 대한 벌이었다. 아, 평생의 후회로도 그 죄를 씻을 수 없구나. 슬프다. 슬프고 슬프구나.
내가 궁금해했던 것을 지금 곧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이란 죽을 때 등잔에 기름이 다해 불이 꺼지듯, 방 안의 전등이 꺼져 암흑에 잠기는 것처럼 의식이 스러지면 모든 것이 그만인 것인가. 그럴 것이다. 그러하리라.
—p. 163
지금 내 주위에는 얼빠진 망령들이 가득하다. 이들은 운 좋게 이곳을 빠져나간다 해도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는 짐 덩어리, 암 덩어리가 되어서 부적응자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평생,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한평생을 그저 주어진 시간을 흘려보내는 미물처럼. 이들은 패배자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한정된 자원이라는 생존조건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의 몫을 내가 빼앗기 위해서는 배신, 속임수, 회유나 설득을 위한 정치기술을 사용하고 폭력이나 살인 같은 범죄조차 불사해야 한다. 그런 인간만이 적자로 생존할 수 있다. 나의 피에는 그러한 적자의 유전자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게 되어 있다. 모두가 모두에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가족, 친구, 연인 간의 사랑도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한 장치일 따름이다. 내가 거기에 연연할 필요가 있는가.
—p. 244~245
—죽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사는 게 훨씬 쉽다. 나는 한번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는 아직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지지하고 지켜줘야 한다. 내가 포기하는 건 가족까지 포기하는 것이다. 내 생명보다 더 귀한 사람들, 어머니, 누나들, 나의 아내, 동생들, 나의 아들, 그리고 돌아가신 나의 조부모, 아버지, 형님까지 모두 그렇다.
—p. 365
성석제 작가의 글은 묘한 매력이 있다. 사람의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든다든가, 극적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튼다든가, 참신한 대상을 소설의 소재로 삼는다든가 하는 것도 아닌데 읽다보면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의 소설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지만 동시에 쉽게 잊혀질 뻔한, 또는 이미 잊혀져가고 있던 이야기들을 다룬다는 점인 것 같다. 특히 이 소설에는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 독재정권을 경험한 세대, 1990년대 후반 금융위기를 경험한 세대, 만연해져가는 학교폭력을 경험한 어린 세대가 모두 등장한다. 전후 한국사회는 너무나도 급변해서 4대에 걸친 이 가족 이야기에는 극명히 다른 시대적 상황을 적어도 둘 이상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투명인간』에서 다루는 핵심적인 주제는 가족의 해체와 개인의 원자화이고, 독자는 주제에 다다르는 여정 속에서 가족의 의미를 반추하게 된다. 그리고 그 주제의 중심에는 묵묵하게 가족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는 만수라는 인물이 있다. 이 소설의 아주 독특한 점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바로 그 핵심인물인 만수를 철저히 타자화하며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소설은 4대에 이르는 가족 구성원과 주변인을 비롯해 수많은 화자들이 소회(溯洄)하는 수십 개의 에피소드들로 구성되는데, 이 글 안에서 만수라는 인물은 단 한 번도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다른 화자들에 의해 관찰되기만 할 뿐이다. 무던하고 어리석다 싶을 만큼 가족에게 헌신적이고, 때로는 사회와 조직에 미련할 만큼 순응적인 만수라는 인물을 통해, 독재정권과 민주화, 자본주의적 극한경쟁 속에서 한국사회가 뼈에 새겨지도록 한국인들에게 가르쳐온 생존전략과 가족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소설을 읽으며 어쩐지 불편한 자세로 병적인 표정을 전면에 드러낸 에곤 실레의 인물화 연작을 보는 것 같았다.
역설적이게도 이 글 안에서 갈무리할 만한 글귀가 많지 않아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거꾸로 말하면 문장과 문단을 단위로 마음에 드는 글귀를 갈무리하기에는, 우리의 자화상을 들여다보게끔 하는 소설 속 이 풍경과 저 풍경을 단위로 훨씬 더 큼지막하게 토막내어 갈무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투명인간』에서 '나'라는 각각의 존재는 거스를 수 없는 시간적 흐름 앞에 한없이 작아지다가도 가족 안에서 그 존재가 커지기를 되풀이한다. 하지만 그러한 왕복운동 안에서 '나'라는 존재를 버티게 해줄 최소한의 기준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 모두는 마침내 한 명의 투명인간이 된다. 그래서 만수처럼 길 위에서 하하호호 이야기꽃을 피우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투명인간은 이미 코앞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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