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는 올해 봄 출장으로 들르면서 한번쯤 여행으로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도시다. 그렇게 해서 하루는 한달 전 쯤인가 무턱대고 숙소를 예약해두었다. 숙소 위치는 목포의 구시가지. 여행 당일이 되고 나름 여름휴가 기간이 끝나가는 시점이라 사람이 많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서울역을 출발한 열차는 광주송정 역을 지나면서부터 퍽 한산해졌다. 마침내 목포역에 내렸을 때, 나를 맞이한 건 바닷바람 한 점 없는 찜통 더위였다. 마치 빛에 타들어간 필름처럼 태양이 쏟아지는 인도가 새하얗게 바랬다. 나는 옷가지와 카메라 따위로 빵빵해진 카키색 가방을 메고 15분여를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한동안 에어컨 바람을 쐬다가 단출한 차림으로 숙소를 나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나머지 갑자기 허기가 찾아왔다. 나는 홍어에 라면이라는 다소 생소한 메뉴에 도전해 보았다. 이곳이 홍어의 고장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딜 가든 '홍어' 자가 들어간 간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손님은 나 한 명뿐이었고, 아주머니는 푹 익힌 라면에 콩나물과 대파, 홍어가 곁들여진 요리를 내오셨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라면 가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목포근대역사관을 갔다. 일제강점기 목포가 인천, 원산, 군산 등지와 더불어서 수탈을 위한 개항장으로 맹위를 떨칠 때, 일본영사관으로 사용되던 공간이다. 빨간 벽돌로 쌓아올린 근대식 건물은 노적봉으로부터 목포항이 훤히 바라다보이는 최적의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다해서 2층짜리 건물에는 목포의 근대사에 대한 소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목포가 단순히 양곡을 수탈하는 공간뿐만 아니라 목화를 재배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접하면서, 식민지로부터 최대한의 이윤을 얻어내겠다는 당시 일본의 야심찬 의도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지금은 사진을 남기기 좋은 명소로 알려진 이곳 역사관에는 목포의 근대사와 더불어서 우리나라의 근대사가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갑신정변에서부터 황국식민화에 이르기까지 19세기 말부터 일제강점기 말엽의 역사까지 소상하게 조망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내용이라고 한다면 20세기 중엽 진행되었던 황국신민화 때의 내용들인데, 전시된 한 호적등본에는 창씨개명된 기록이 남아 있다. 본래 성이 김(金) 씨인 듯, 카네(金)로 뒤바뀐 이름에서 조악스러움을 느낀다. 뒤이어 창씨개명이 80%를 상회했었다는 당시의 놀라운 통계들을 보면서, '말'을 통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침습적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