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즈베키스탄에 대해서 무얼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내가 생각했던 건 사마르칸트라는 낱말 그 하나였다. 우즈베키스탄은 보이지 않는 세상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은 그러니까 ‘미디어에서’ 보이지 않는 세상이었다. 중국이나 인도처럼 경제적인 중요성이 강조될 필요도, G7처럼 강대국의 역할과 위상이 강조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세상. 그곳에서 내가 찾았던 건 한때 찬란한 번성을 누린 사마르칸트라는 신기루나 다름없는 도시의 이름, 그 허울뿐이었다.
나는 그곳이 라틴 알파벳보다 키릴 문자에 익숙한 세상이라는 것을, 유목민적 생활패턴보다도 이슬람적 생활패턴이 확고한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당연히 있을 거라 여길 만한 글로벌 프랜차이즈가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위도가 높아도 여름에 우리나라보다 한참 더운 세상이라는 것을, 물가가 우리나라의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화폐가치가 낮아 모든 게 비싸 보이는 세상이라는 것을, 낯선 이방인에게 매우 열려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구는 구(球)가 아니었다. 존재는 편재(偏在)해 있었다. 그것도 완전히. 우리나라와 서방세계 사이를 공간적으로 메우는 무수히 많은 국가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알기란 대단히 어렵다. 서유럽의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맛깔스런 음식, 뙤약볕이 내리쬐는 지중해의 에메랄드빛 해안, 뉴욕의 마천루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는 시민들, 우리가 매체에서 친숙하게 접하는 것들, 동경하는 것들. 하지만 어느때보다 발전된 기술 안에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우리가 간과하는 세상의 응달이 이렇게나 짙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스포트라이트가 부각되기 위해서는 어두운 무대가 있어야 하듯, 알록달록한 조명을 공간도 방향도 없이 달랑 내리꽂을 순 없는 일이다. 물론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그런 세계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냐고, 우리가 그런 세계에서 배울 것이 있냐고. 그에 대한 반박은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동문서답이지만, 그런 세계는 지금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존재할 거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말, 생각, 삶은 우리의 말, 생각, 삶이 이어져온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과 같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불편한 것 투성이였던 짧은 우즈베키스탄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내가 ‘아주 익숙한’ 삶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었다. 9 to 6로 일할 직장이 있다는 것, 손가락 끝으로 몇 초면 배달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는 것, 적당히 휴가를 내면 홀연히 해외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포기하기 어려운 안락함이다. 하지만 내 삶에서 통제가능한 것들을 확실히 통제해 갈수록, 통제불가능한 것들의 불확실성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은 늘어간다. 익숙함에 옭아매일 수록 익숙치 않음을 견디기가 힘들다. 나를 사회적으로 또는 관성적으로 규정하던 것들이 나를 벅차게 할 때, 그 틀 바깥에 나를 위치짓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때때로 불가피한 고됨도 불편함도 감수해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진부한 얘기는 아니다. 삶의 방식이 이렇게나 다양할 수 있으며 한국에서의 삶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는 얘기 역시 아니다. 그냥 우리는 우리라는 존재의 이런저런 면과 삶에서 마주하는 이런저런 사건들을 관조(觀照)하고 때로는 깊이 들여다볼 용기(勇氣)가 필요하겠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지구가 완벽한 구(球)라는 지식의 유통과 미디어의 묘사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존재의 여러 면들 중 줄곧 한 면만 봐왔던 건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