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현상소에서 켄트미어 400이라는 흑백필름을 추천받았다. 흑백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지는 좀 되었지만, 막상 흑백 필름을 사기는 망설여졌다. 어디선가 흑백사진이 더 찍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똑같은 사물을 찍어도 색이 휘발된다는 게 어쩐지 손해보는 느낌도 들었기 때문이다. 흑백필름을 구입하던 당시는 마침 벚꽃철이었기 때문에 이 계절의 화사함을 무채색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있었다.
그간 주로 써왔던 포트라 400이 아닌 다른 필름을 쓰는 건 워낙 오랜만의 일이라, 셔터를 누를 때마다 좀 더 공을 들이고 아껴가며 쓰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36칸의 필름 안에 도시 속 달동네, 봄이 찾아온 사찰, 우리집 강아지, 길을 걷다 발견한 라일락 등등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 중 가장 먼저 실험의 대상이 된 피사체는 서계동, 만리재의 북쪽 끝자락에 걸친 빌라촌의 풍경이다. 이날 역시 회사에서 쌓인 감정 부하를 털어낼 겸 퇴근 후 새로운 장소를 찾고 있었다.
서계동(西界洞), 청파동의 한 법정동인 이 동네의 이름은 참 정(情)도 없다. 서쪽의 경계. 오래된 느낌의 지명이 많은 종로, 중구, 용산 일대에서 서계(西界)라니. 무엇의 서쪽을 구분짓는다는 건지 알려주지도 않지만, 대충 서울역 서부라고 불리는 일대의 테두리를 이루는 동네겠거니 얼렁뚱땅 짐작한다. 이 동네에는 유난히 미싱집이 많은데, 서울역 고가도로가 보행 산책로로 변모한 걸 계기로 교통환경 또한 크게 바뀌면서 동네 전체가 쇠락해가고 있다. 손기정 체육공원 틈새를 비집고 기발하게 들어선 신식 아파트들이 바로 길 건너 빨간 벽돌집들과 대비를 이루는 이곳.
사진을 남기러 간 동네의 한 상가 건물은 정육면체가 아니라 구부러진 길을 따라 어렵사리 자리를 튼 건물이었다. 그마저도 가파른 경사가 계속되는 길에 위치한지라, 그 길가에 접한 가게들이 위치한 층수도 다를 뿐더러 단차를 만회하고자 시멘트로 급히 세워올린 층계참들이 비뚤배뚤한지라 제대로 된 직선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 건물이었다. 그럼에도 그 상가를 채우고 있는 청과물, 어산물, 정육 가게에는 손님들이 찾고 있었고 오토바이가 소리를 내며 물건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생동감 있는 풍경이었다.
해가 길어지면서 퇴근을 한 이후에도 저물녁 해가 아직까지 하늘에 남아 있었다. 애오개역에서 만리재를 오르며 만난 풍경 속에는 방금 소독을 마친 듯 깨끗한 아파트도, 회사원들이 부담 없이 찾을 법한 국밥집도, 돌담 위로 아슬아슬하게 올라선 2층 빌라도, 그 곁의 전봇대와 새순이 올라오는 커다란 나무도, 길 끝에 나타난 갈림길도 있었다. 이 중 진짜 세상은 무엇일까. 지평선에 닿은 해는 이제 빛을 잃어가고 이 세상 또한 색을 잃어간다. 나의 생각도 힘을 잃어가고 렌즈가 담을 사물들도 사라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