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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마켓성탄을 앞둔 주말 서울의 한 프랑스계 학교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마켓에 다녀왔다. 이른 아침 오늘 시장이 선다는 C의 연락이 있었다. 이날 애매한 오후 시간대에 지인의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에 예식장에 가기 전 잠시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켓에는 프랑스와 관련된 수제공예품과 먹거리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 나에게 한 학기간 프랑스어를 가르쳐주었던 B와 B의 소개로 오랜 친구가 된 C를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럽에 여행을 가서도 들러본 적 없는 크리스마스 마켓을 서울에서 접하니 감회가 다르다.
B와 C는 언제 보아도 밝고, C의 절친인 E는 여전히 강한 비음 섞인 프랑스어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올해 봄부터 마크라메(Macramé) 재료를 구하려고 동대문 시장을 찾는다는 C의 얘기는 들었지만, 연말 크리스마스에 그 공예품을 내놓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지라, 다시 한번 C의 열정이랄지 부지런함에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근래 이직 준비에 이사 준비까지 겸하고 있는 C였다.
나는 마켓 구석의 한 가판대에서 B가 추천하는 라클레트(Raclette)를 사들고 온 다음 B와 한바탕 수다를 떨었다. 내 프랑스어 실력은 그 사이 현격히 퇴보했고, 그럼에도 더듬대는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한때 나의 교수였던 B와 반말(tutoyer)를 섞고, 한국과 프랑스의 긴박한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 대학로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호탕한 프랑스인 아저씨가 이따금 옆 부스인 C의 자리로 와 껄껄 웃으며 농담은 던졌고(Qu'est ce qu'elle a fait를 줄여 말하면 café가 된다는) 이 독특한 행사장을 찾은 주한 프랑스 영사는 차례차례 인사를 돌더니 B, C와 이웃처럼 대화를 주고 받았다.
나는 한 시간 반 정도 해찰을 떨다가 C가 만든 하양 마크라메를 하나 사들고 다음 약속장소로 향했다. 이미 내가 사는 곳에는 많은 화분과 식물이 있는지라, 이날 사온 마크라메는 본가에 걸어 두었다. 실의 색깔, 화분의 색깔, 구(球) 모양의 장식까지 하나하나 맞춤형으로 만든 C의 수제품은 그 자체로 프랑스를 떠올리게 했다.
# 근교 여행하루는 차를 렌트해 근교에 혼자서 마실을 다녀왔다. 억압적이었던 가을 학기가 끝나 일종의 기분전환이 필요했고, 장거리 여행을 가기에는 체력이 방전된 상태였다. 마침 한동안 눈이 내린 직후였기 때문에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담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남양주를 거쳐 양평으로 가는 길, 오른편으로 한강이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 보인다. 서울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시야 먼 구석으로 눈덮인 산봉우리가 보인다는 사실에 의외로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일전에 한번씩 들른 적 있었던 장소들을 경유하며 뚜렷한 일정도 없이 북한강변을 쏘다녔다. 꼬마 시절에는 티끌없이 쌓인 눈밭을 무참히 짓밟은 발자국들을 보며 환멸을 느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눈밭을 보며 무정(無情)함을 느끼는 걸 보면 내가 세상을 살아가며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는 뉘엿뉘엿 해가 넘어갈 때까지, 고운 눈의 입자들이 저마다 그림자를 드리울 때까지 눈 쌓이 오솔길을 세상에 마지막 남은 동물처럼 터덜터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