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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살인(드러나는 이데아 篇)일상/book 2017. 3. 28. 15:46
이 책을 처음 접한 건 순전히 우연한 기회에서였다. 인터넷에서였던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이 출간되었다는 뉴스를 봤는데, 여기에 "난징 대학살"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국의 과거사에 대해 전향적인 발언을 해왔다는 사실을 종종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난징 대학살"을 언급했을지 궁금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꽤 여럿 읽었는데, 우선 원서로 읽기에 무난하다는 이유가 컸다. 일본어를 까먹지 않으려고 가능하면 일 년에 한 권 정도는 원서를 읽으려고 하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서는 서점에서 구하기도 쉽다. 또 현대 일본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이라고 하니, 읽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틈틈이 찾아 읽고는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서 가장 거부감 드는 부분이 과도한 세부묘사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만큼 기업의 브랜드명이나 사물의 고유명사가 자주 등장하는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다. 가령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식사로 아보카도를 썰어넣은 샐러드를 먹거나 샌드위치에 스크램블을 먹는다.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화이트 위스키에 미네랄워터를 넣어 마신다. (그러나 장을 보거나 설거지하는 '불필요한' 장면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차는 재규어를 몰고 이따금 닛산의 인피니트를 몰기도 한다. 주인공은 직업상 평범한 화가인데 생활방식은 뭐라 해야할지.. 전혀 소박하지가 않다. 일본어로 들어맞는 표현을 찾자면, 무라카미의 작품은 "贅沢(ぜいたく : 사치스럽고 돈이 많이 들어간 느낌)"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문제는 이런 소설 속 등장인물의 외면 묘사가 내면 묘사를 제한시킨다는 점이다. 무라카미가 등장인물들을 묘사하는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인물의 '내적 갈등'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을 움직이게 하는 요인은 '탐닉' 또는 '호기심'일 뿐이다. 가장 아쉽게 느끼는 부분이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미 욕구가 충족된 상태에 있거나 욕구를 충족시킴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사람들'이다. 사랑도 만남도 이별까지도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간단하다. 읽다 보면 이토록 비현실적인 얘기를 이렇게나 현실인 것처럼 쓸 수 있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놀라울 만큼 막힘없이 흘러가는데, 누군가는 그를 '언어의 마술사'라 일컫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이 '개인이 경험한 신기한 일을 굳이 길게 풀어쓴 일기'로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1Q84>도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도 마찬가지다. 여하간 앞선 두 가지 이유―원서를 접해야겠다는 이유, 그리고 일본의 대표문학을 접한다는 이유―로 다시 한 번 무라카미의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책을 집어든 이상 최대한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그 가운데 내가 주목한 부분은 그가 소설에 차용하고 있는 몇 가지 눈에 띄는 모티브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젊은 시절 영문학에 심취해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활용하는 모티브들만 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몇몇 표현이나 주제는 그가 서구적 가치나 물질세계에 경도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느껴지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유달리 돋보이는 점이라고 한다면 '일본다운 것'에 대한 고민이 동시에 드러난다는 점일 것이다.
#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무라카미의 작품에는 유난히 재즈나 고전음악 관련한 문장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로 미루어 그가 음악에 관심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부터는 무라카미가 "미술"에도 손을 뻗기 시작한다. 일찍이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색깔로 구분지은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미술'을 업으로 삼는 등장인물을 내세우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소설의 전면에 등장하는 주인공 '나'의 직업이 바로 화가인데,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는 것 또한 이 화가가 어떤 독특한 작품을 접하면서부터이다. 그 작품의 제목은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기사단장 살인>. 이 그림은 일본화의 틀을 갖추고는 있지만 모티브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에서 차용한 것으로 소설 속에서 묘사된다. (그러고 보면 오페라라는 장르 또한 청각적인 요소 못지 않게 시각적 요소가 강조되는 예술이다)
그림의 작자가 왜 다름아닌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그 안에서도 <기사단장 살인>이라는 에피소드에서 "일본화"의 영감을 얻었는지 지금 단계로서는 알 수 없다. 참고로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 <기사단장 살인>이라는 에피소드는 돈 조반니(또는 천하의 바람둥이 '돈 후안'으로 더 잘 알려있기도 하다)가 기사단장의 딸을 겁탈하려는 과정에서 기사단장을 살해하는 사건을 담고 있다. 그러나 묘령의 일본화는 같은 장면을 좀 다른 의미로 표현한다. 즉 젊은이(신세계)가 노인(구세계)를 무참히 찔러 죽이는 것 그 자체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
젊은이(신세계)가 짓밟고 올라서야 했던 구세계란 무엇일까. 또는 청산해야 할 과거의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인가. 이 현장을 목격한 그림 속 관찰자들(노인의 딸로 보이는 여인, 심부름꾼, 땅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의미심장한 눈길로 사건을 응시하는 의문의 인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으로 염두에 두고 읽을 부분이다.
한편 소설에서 일본화 <기사단장 살인>의 작자로 소개되는 아마다 토모히코(雨田具彦)라는 인물은 1930년대 오스트리아 빈에서 서양화를 공부했지만 일본으로 귀국한 뒤에는 돌연 일본화가로 전향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가 빈에서 머무른 시절은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도 노골화되어 가던 시기이다. '나'는 양차 세계대전과 관련이 깊은 '빈'이라는 도시에서 서양화를 배우던 그(아마다 토모히코)가 돌연 일본화로 기울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이와 관련해 무라카미가 앞으로 어떻게 얘기를 풀어갈지가 궁금하다)
# 우에다 아키나리(上田秋成)의 「봄비이야기(春雨はるさめ物語)」
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는 모티브가 바로 우에다 아키나리의 「봄비이야기」다. 매우 일본적이면서 불교적이기도 한 소재다. 무라카미는 그 가운데에서도 「2세에 걸친 부부의 인연(二世の縁えにし)」 편을 빌려 온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설 속 주인공은 어느날 밤 책을 읽던 중 기묘한 소리를 듣는다. 소리가 나는 곳을 파헤쳐보니 웬 비쩍 마른 남자가 땅 속에서 징을 두드리고 있다. 이는 참선(參禪) 행위의 하나로 '산 채로 입정(生入定なまにゅうじょう)’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生入定"을 풀어 설명하면, 불법(佛法)을 깨닫기 위해 산 사람이 자진하여 관에 들어가 땅 속에 묻히기를 택하는 참선 행위이다. 땅 속에 묻힌 수행자는 목탁을 치며 경전을 읊지만, 이내 경전소리는 사그라들고 수행자는 그 상태에서 서서히 미라가 된다. 그리고 3년 3개월째 되는 날, 땅 속의 수행자는 즉신불(即身仏 : 살아있는 부처)로 현현(顯現)한다.
(너무나) 허황된 이야기 같지만, 우에다 아키나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에다 아키나리는 말년이 되어 회의주의에 기우는데, 이러한 염세주의적 세계관은 그녀의 작품세계에 그대로 반영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주인공은 묽은 죽을 먹여가며 땅 속에서 발견한 남자를 소생시킨다. 그런데 '즉신불'이 되어야 마땅한 문제의 남자는 원기를 되찾자, 육식을 서슴지 않고 여자를 탐한다. 생사를 뛰어넘어 열반의 경지에 도달했어야 할 이 '즉신불'이 보이는 행동은 주변사람을 아연실색케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보며 불법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
<기사단장 살인>에서는 이 기괴한 이야기가 변형되어 중요한 모티브로 차용되고 있다. 소설속 '나'는 「봄비이야기」의 주인공과 비슷한 소리(무라카미의 작품에서는 방울소리)를 한밤중에 듣고, 멘시키와 합심하여 집 근처 땅을 파내려간다. 왜 하필 이런 기괴한 이야기를 빌려왔는지는, 워낙 현실과 비현실을 왔다갔다 하는 무라카미 작품의 특성상 꼬집어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자국의 고전문학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무라카미는 <IQ84>라는 제목조차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빌려왔을 만큼 워~낙 서양문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해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소설 초반에 "일본화란 무엇인가?" 그 정의에 대해 '나'와 '멘시키(免色メンシキ : 말 그대로 '색을 지우다'는 의미의 이름이다)’가 토론하는 장면이 있다. '일본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는, 내가 기억하기로 무라카미가 본격적으로 다룬 적이 없었던 주제다. 그래서 집중해서 흥미롭게 읽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주인공 '나'와 '멘시키'―곧 무라카미―의 이야기가 "비서구적인 것=일본적인 것" 또는 "서구적인 것=일본적이지 않은 것"이란 전제를 깔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에 그러한 전제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내가 독자로서 느끼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 둘의 대화에 따르면, '서구'의 여집합에는 '일본'만 있을 뿐이다. 다른 세계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가령 '멘시키'는 화가인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회화(絵画)가 비서구적이라 함은 일본화로서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입니까?"
물론 앞뒤의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할 때, 이 둘의 대화는 보다 폭넓은 주제를 건드리고 있다. 그렇지만 위의 문장(질문)만을 놓고 보면,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이게 "탈아입구(脫亞入歐)"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칠게 말해서, 서구문화와 일본문화를 병치시키면서 기타 문화는 논외로 치부하는 문화적 '오만함'이 엿보였던 장면이었다.
# 루이스 캐럴(Lewis Carrol)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
1편 <드러나는 이데아>의 후반에서는 이윽고 그림 속 기사단장이 현실 속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확실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심지어 기사단장은 사람과 똑같은 크기가 아니라, 땅딸막한 난쟁이로 등장한다. 또한 시간에 따라 마음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할 수 있다. 주인공인 '나'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데, 심지어 '나'의 속마음을 읽어내기까지 한다. (이쯤 되니 해리포터의 '도비'가 떠올랐다^~^;;) 무라카미의 글이 아무리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왔다갔다 한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판타지적인 요소를 활용한 적이 있었던가 싶을 만큼 파격적이다.
개인적으로 이쯤 되면 이걸 일반적인 문학으로 봐야 되는 건지 의문이 들기까지 했다. 여하간 무라카미는 이 판타지적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소설에 여러 장치를 심어 놓는다. 그 중의 하나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앨리스가 토끼의 안내에 따라 동굴을 지나자 원더랜드가 펼쳐졌던 것처럼, 무라카미의 소설 속 '나' 역시 '동굴'을 지나 난쟁이 기사단장이 동행하는 이상한 세계에 다다른다.
'나'가 지나간(또는 경험한) '동굴'은 이미 앞서 등장한 바 있다. 바로 '나'와 멘시키가 파낸 '구덩이'가 그것이다. 불가사의한 방울소리의 근원이자 어두컴컴해서 그 속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구덩이'는 '나'에게 끊임없이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목구멍에 걸린 생선가시 같은 존재다. 그런데 마침내 '구덩이'의 존재에서 해방되었다고 느낀 지점에서, 난쟁이 기사단장이 나타나 '나'를 새로운 정신적 세계로 초대하는 것이다.
무라카미 본인도 난쟁이 기사단장의 등장에 개연성을 부여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아예 동굴에 관한 에피소드를 하나 더 덧붙였다. '나'가 동생 '코미치(小径 : 직역하면 '좁은 길'을 의미하는 이름이다)'와 후지산의 풍혈(風穴 : 산의 사면에 난 동굴과 같은 구멍)에 들어가서 겪은 에피소드가 그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의 주된 줄거리와는 전혀 상관 없는, 기발하다고 한다면 기발한 이런 소재를 어떻게 찾는지 궁금하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들 톱니바퀴(에피소드)들이 맞물려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능력인데, 그런 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질린다 싶을 만큼 치밀한 솜씨을 뽐낸다.
좌우간 이 어두컴컴한 '동굴'의 끝에 새로운 요지경이 펼쳐진다는 전개가, 꼭 앨리스가 원더랜드에 발을 들여놓는 것처럼 묘사된다. 기사단장을 굳이 '난쟁이'로 설정한 것도, 어떤 면에서는 몸집이 늘어났다 줄었다 하는 원더랜드 속 '앨리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참고로 이 소설에서 무라카미는 변태적이다 싶을 만큼 서양문화 가운데에서도 영국적인 컨셉을 많이 활용한다. 예를 들어 주인공들이 사케나 녹차 대신 위스키나 홍차를 자주 마시는 설정도 그렇고, 등장인물들이 털실로 된 스웨터(그것도 반드시 영국풍의 스웨터;;)를 입는 것도 그렇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물론 많은 예술가들이 즐겨쓰는 소재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쓰니 왠지 색안경을 쓰고 보게 된다...-_-)
끝내며...
포스팅을 쓰다보니 피곤하다 싶을 만큼 분석적이고 다층적인 소설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리뷰하기 힘든 작품은 처음이다. 아직까지는 다음 편인 <움직이는 메타포>를 읽어봐야 전체적인 윤곽을 보다 확실히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1순위로 거론되다보니 그런지는 몰라도, 갈수록 서구에 소개되기 쉬운 소재와 표현을 즐겨 쓰는 것 같다. 굳이 '일본의 정체성'과 '반전(反戰)'을 주제의식으로 다루는 것도, 어찌보면 서구 문학계에 본인의 매력을 어필하려 애쓰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로서는 소화하기가 힘들었는데, 일본인들은 이번 작품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지 자못 궁금하다.
한편 '나'가 화가로서 멘시키의 '초상화'를 그려나가는 과정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초상화'를 그리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데미안의 얼굴이 선(善)과 악(惡)의 중간에 위치했던 것처럼, 멘시키의 얼굴은 현실과 비현실의 중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서로 다른 두 세계란 도대체 무엇일까?
앞서 소설 초반 '일본화'에 대한 토론에서 멘시키는 예술 장르의 경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분이) 자명하지만, 그 자명함을 언어로 바꿔 말하기는 어려운 것(自明であるが、その自明性を言語化するのはむずかしい)"
"외부압력과 내부압력에 의해 결과적으로 생겨나는 접면(外圧と内圧によって結果的に生じた接面)"
이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가 더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요컨대 무라카미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그 이면에 존재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세계'를 조화시키고자 노력한 것 같다.
여하간 오랜만에 그 나라의 말로 그 나라의 문학을 읽어서 새로운 자극을 받은 점이 가장 좋았다. 듣기로 <기사단장 살인>(제목이 정확히 어떻게 번역될지 궁금하다)의 판권을 따기 위해 출판사간 각축이 어마어마했던 모양이다. 무라카미의 작품세계가 그만큼 심오하고 방대한지, 그것도 아니면 문학적으로 문장 하나하나에서 멋이 느껴지는지, 또 그것도 아니라면 그의 작품이 현대 일본문학의 대표선수로 나설 만큼 일본문학을 계승하면서 보편성을 갖추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물음표를 던지게 하는 작품이었지만(;;),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일본작가인 만큼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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