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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일상/book 2017. 3. 19. 22:37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 존 리더 / Humanist>
도시화 과정의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중앙집권―흔히 전제―체제를 취하며,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고 대규모 건축물로 도시국가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정의는 전 세계 고고학적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한 가지 해석이 우세하면 다른 대안의 가능성조차 묻혀버리는 걸까? 건축물을 '영속성의 지표'로 삼지 않고도 복잡한 사회를 성장으로 이끄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실용성을 앞세운 다른 관리 전략도 있지 않을까?
…진화의 역사를 통틀어 아프리카의 인구는 비교적 작은 집단을 이루어 살았다. 이는 인간이 수천 년 동안 도시와 국가를 이루지 않고 작은 공동체에서 충분히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실제로 아프리카가 인류 역사에 가장 뚜렷하게 기여한 부분은 바로 국가가 없이 평화로이 어울려 살아가는 문명적 기술이다. 그러나 인간 진화의 역사가 다 그렇듯이 아프리카의 작고 평화로운 공동체들은 생태적 자구책의 소산이었다. 즉 척박한 토양, 변덕스러운 기후, 각종 해충, 다양한 질병을 옮기는 기생충이 지구상 다른 어느 곳보다도 많은 적대적 환경에서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곡물과 가축이 사육된 서아시아의 농경과 달리 아프리카 토착 농경은 폭넓은 지역에서 중심이나 핵심 지역, 단일한 발원지도 없이 작물, 전통, 기술이 혼합된 양태로 발전했다. 그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서아시아와 그 너머 지역의 경우에는 농경이 정착된 곳에서 강압적 중앙집권 체제가 성립했으며, 종교 신앙의 외피를 두르고 백성들을 통치했다. 반면 아프리카는 기후를 예측할 수 없고 매우 다양한 환경 여건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농법이 필요했다. 중앙화보다는 다각화가 적절했다. 작물의 다각화와 전문적 지식이 성공 전략이었고, 신앙과 민족적 정체성의 다양화도 중요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데 왜 콧잔등이 시큰하던지
사람들은 남의 행복은 우열을 가리려 기를 쓰지만, 불행에 대해서는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역사는, 얼마나 인간이 인간에게 무자비할 수 있는지 목격할 수 있었던 가슴 저미는 역사였다
비록 우리의 역사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겪은 불행한 역사는 무게에 관계 없이 불행 그 자체만으로 울림이 충분했다
유럽이 간섭하지 않았더라도 아프리카는 토착 역량에 기반해 성장할 수 있었을 테고, 독자적인 경로를 걸어 현재까지 왔을 것이다. 밖으로부터의 본보기보다 안으로부터의 동력을 바탕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15세기에 그 계기를 놓쳐버렸고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그때부터 아프리카의 역사는 고대의 대륙과 그 주민들이 현대인의 자만을 수용하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그 현대인의 조상은 10만 년 전 고향―아프리카―을 떠났으나 500년 전에 고향으로 돌아와 마치 그곳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했다.
…월스트리트의 자산수탈자(asset-stripper)처럼 아프리카 노예상은 자신의 수중에 있는 인간 자원을 약탈하면서 그 행동의 넓은 의미와 장기적인 결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형제, 친척, 이웃을 닥치는 대로 잡아넘겼다. 그들의 유일한 논리는 아프리카 사회에서 노예란 원래 흔했다는 것뿐이었다. 즉 노예는 유럽 상인이 공급하는 물자보다 더 가치 있는 상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프리카는 늘 인구 부족에 시달렸다. 변덕스러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문제에 대처할 만큼 인구가 충분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수입 물자를 획득할 기회가 주어지자 아프리카인들은 사람을 팔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왜 사람을 내부에서 부리지 않고 팔기로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재산'에 대한 권리와 의무가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분배되는 정치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탈은 근대사에서 유럽 이외의 대부분의 국가가 경험한 아픈 기억이다
상대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그 동안 문헌을 접해보기 어려웠던 아프리카의 고대사와 현대사에 관한 부분이었다
흔히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짓는 기준으로 '직립보행'을 드는데
최초의 유인원이 태양빛으로 인한 열손실을 막기 위해 머리 부위만 햇빛에 맞닿도록 변화하는 과정에서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는 점
그 때문에 다른 동물과 달리 유달리 머리 부위에만 털이 남아 있다는 가설이 재미있었다
아프리카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대륙형 육괴이자 가장 오래된 암석, 생명의 샘, 인류의 요람이지만, 동시에 지구상에서 가장 심하게 분열된 대륙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의 불운은 유럽에 약탈당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국민국가'의 관념이 역사 과정에서 주요한 결정 요소로 확고히 뿌리내릴 무렵 식민지화되었다는 점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 혹은 한 세기 전의 영국의 명예혁명부터 시작해 유럽은 19세기 내내 국가 건설의 진통을 겪었다.
…1850년대까지 소수에 불과했던 유럽 국가들은 19세기 말에 수십 개의 독립국으로 몸집이 커졌다. 이 과정은 해외에도 확산되어 어디서나 국가 건설이 상업적·전략적 관심을 모았다. 아프리카는 특히 취약했다. 그 결과 오늘날 아프리카 대륙에는 국가가 무려 46개나 된다. (그 밖에 섬나라 5개국도 있다) 국가의 수는 아시아의 3배가 넘고(아시아의 육상 면적은 아프리카의 50퍼센트 가량 넓다), 남아메리카의 4배에 가깝다.
책이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은 더욱 흥미롭다
대부분의 외부인이 바라보듯 아프리카 사람들은 야만적이고 호전적인가?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문제다
아프리카인들은 중앙집권적 체제가 아닌 부족 시스템 안에서 나름의 생태계를 잘 가꿔가고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에 분란의 씨앗을 심은 것은 외부인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국경이란 요루바족이 아니라 영국인과 프랑스인을 구분하는 것일 뿐이다"
어느 요루바족 추장의 말이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이들에게 영토 개념을 적용하고 국경선을 자신들의 구미에 따라 마음대로 그어버린 건 외부인들이었다
아프리카 인들에게는 어떠한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보어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전쟁의 예행연습이었다. 이 전쟁을 계기로 군산 복합체가 국가 경제보다 우위에 섰고, 국가 산업과 인력이 해외의 전쟁에 대규모로 동원되었으며, 기관총, 철조망, 참호, 수용소 등 20세기 전쟁의 공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 연합국이 유럽의 전쟁―제1차 세계대전―을 아프리카에까지 확대시킨 데는 전략적 정당성이 있었다. 군사적 견지에서 독일의 공격력을 무력화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영토 확장도 추가 유인이 되었다. … 제1차 세계대전이 아프리카에 미친 결과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아프리카인 250만 명, 전 인구의 2퍼센트가 어떤 형태로든 전쟁과 연관되었다. "노예무역이 절정에 달했을 때도 한 해에 인구의 10분의 1이 노예로 팔려간 적은 없었다." 아프리카가 도발한 전쟁도 아니고 아프리카가 얻을 것도 없는 전쟁이었다.
"르완다에서 투치족 인구는 불과 100일 동안 93만 명에서 13만 명으로 대폭 감소했다"
1994년 르완다에서 후투족에 의해 자행된 대대적 인종학살의 통계적 수치다
우리는 김영삼 정부 2년차를 맞이 하던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과거의 일이다
통혼이 흔하고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부족의 구별이 없던 이 땅 르완다에서 불과 몇 세기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감히 불행에 우열을 가릴 수 없지만,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일제의 동아시아 대학살,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엽기적인 테러행위와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단지 불행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해서 무딘 감정으로 이런 살상을 일삼는 게 인간이란 존재일까?
인간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사는 기원후의 21세기 초, 지금의 이 시대가 '그나마' 평화로운 시대로 기록될 것인가?
? ? ? ? ? ? ?......?
물음표에 물음표가 꼬리를 잇게 만드는 한 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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