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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와 공작 / 헬레나 크로닌 / 사이언스북스>
건축가에게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가공하지 않은 돌들로 건물을 세우라고 요구하자. 이때 각 돌 조각의 모양은 우연의 산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중력의 힘, 바위의 속성과 낭떠러지의 경사에 따라 결정됐을 것이다. 이 사건들과 조건들은 모두 자연 법칙에 따라 정해진다. 그러나 이 자연 법칙들과 각각의 돌 조각을 건축가가 사용한 용도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각 생명체의 변이들은 확고한, 변하지 않는 법칙들에 따라 같은 방식으로 결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법칙들과 선택의 작용으로 천천히 형성되는 생명체의 구조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진화의 시간을 거치면서, 어떤 성공적인 전략이 한 개체군 내에 확산되면 마침내 그 전략이 가장 자주 부딪치는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 된다. 만약 이 전략이 침해되지 않는다면, 그 전략은 자기 자기 자신과 마주쳤을 때도 성공적이어야만 한다. … 전통적으로 진화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 적응으로 어떤 이익을 얻느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화 게임 이론은 이 질문에 똑같이 중요한 새로운 질문을 덧붙인다.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인가?"
고전 다윈주의에서 성 선택은 자연 선택과는 완전히 다르며 대개는 반대되는 이상한 것이었다. 그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 않다. 성 선택은 수컷들 사이의 경쟁을 야기하며, 수컷 자신이 속한 종의 구성원들의 선호에 따라 이끌어진다. 자연 선택의 전형적인 동인은 종 간에 있지 종들 내부에 있지 않으며 비사회적이다. 성 선택은 오직 번식 성공도와 관계 있다. 자연 선택에서 성공과 실패는 생존과 번식의 모든 측면을 아우르는 엄청나게 넓은 범위를 포괄한다. 성 선택은 장식적이며, 무의미하고 심지어 순전히 해로운 특성도 선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연 선택은 효과적이고 실용적인 특성들만을 언제나 선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문화의 진화도 다윈주의적이라고 여기는 것들, 다윈주의적인 과정의 진단이라고 여기는 것에 의존한다. 다윈주의는 복제자들의 선택에 대한 이론이라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분석에서 자연 선택의 조종을 받는 유전자들이 다윈주의적인 모형의 유일한 후보일 필요는 없다. 문화 선택의 조종을 받는 '밈(meme)들' 역시 다윈주의적인 설명에 적합할 수 있다. … 우리는 문화의 진화가 지상의 생명체의 진화처럼 다윈주의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성 선택 문제에 관하여 고전 다윈주의자들의 견해를 분류한 도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면서 세상을 이렇게 바라볼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한 적이 있다. 「개미와 공작」은 근대 다윈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에, 그 밑거름이 된 "고전 다윈주의"의 논의를 다룬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기적 유전자」와 같이 근대 다윈주의에 관한 책을 한 권 읽은 뒤에 이 책을 읽는 것이 더 이해가 빠를 거라 생각한다. 저자인 헬레나 크로닌은 고전 다윈주의의 한계를 지적함에 있어 근대 다윈주의를 논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책의 초판이 1991년임을 감안하면, 이미 20년도 더 전에 '진화'에 관해 이 정도의 논의가 진척되었다는 것이 대단하다 싶을 따름이다.
고전 다윈주의와 근대 다윈주의의 차이를 포스팅을 통해 단 몇 마디만으로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대표되는 개념을 통해 커다란 구분점을 두 개 정도 뽑아낼 수 있다.
첫째, 고전 다윈주의는 개체 중심적―가끔은 집단 중심적인 혼용된다―이지만, 근대 다윈주의에서는 유전자를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 둘째, 고전 다윈주의에서는 적응을 통해 얻는 이익 측면에 초점을 맞추지만, 근대 다윈주의에는 비용을 중시한다. 저자 헬레나 크로닌은 대다수의 진화 사례가 근대 다윈주의를 통해 보다 정합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앞으로 진화에 대한 연구가 진척된다면 또 어떤 새로운 논의가 이루어질지 모를 일이다.
주제는 크게 두 가지다. 소위 "적자생존"으로 대표되는 다윈주의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성 선택과 이타주의다. 성 선택 문제는 공작의 사례를 통해서, 이타주의 문제는 개미의 사례를 통해 설명된다.
고전 다윈주의에서 진화에 대한 접근법은 아주 개괄적으로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 '비적응적인' 진화 측면을 강조한 다윈이다. 둘째, '적응적인' 진화 측면을 강조한 월리스다. 이때 '비적응'이라 하는 것이 '적응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적응(자연 선택)과 무관한 자질'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령 수컷 공작의 화려함에 대해, 다윈은 암컷이 순전히 심미적으로 수컷의 꼬리를 관찰·평가한다고 설명한다. 이때 미적 우위는 자연 선택의 관점에서 생존가능성을 높여주는 자질은 아니다. 반면, 월리스―책에서는 다윈보다 더 다윈주의적인 사람이라 묘사된다―는 수컷의 꼬리는 원기왕성함과 강인함의 발현이라 말한다. 이는 분명 자연 선택의 관점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자질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암컷 공작은 수컷의 활력에 매료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근본적으로 왜 "수컷→암컷"이 아닌 "암컷→수컷" 방향의 성 선택 매커니즘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논의도 등장한다)
글의 후반부에는 인간의 "도덕성"을 진화의 관점에서 어떻게 설명을 시도했는지 다양한 관점이 나오는데, 흥미롭다. 인간과 인간 외 하등동물을 구분지으려는 시도가 있는가 하면(월리스의 경우), 인간을 모든 동물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다윈의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도 논리적으로 명료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기는, 이 "도덕성"이라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알쏭달쏭한 주제다.
제목과 목차만 봐서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덜컥 읽기 시작한 책인데, 막상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고전 다윈주의의 축을 이룬 다윈과 월리스, 그밖의 중간지점에 놓인 여러 학자―헉슬리, 스펜서, 굴드 등등―들의 문헌을 풍부하게 실어 이만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는 점에서 헬레나 크로닌의 열정이 대단하다고 느껴졌고, 같은 대상과 현상을 놓고 전혀 다른 해석을 구하는 옛 학자들의 논리가 흥미로웠다.
'진화'는 철학, 생물학, 물리학, 신학도 아닌 매우 오묘한 위치에 자리한 영역인 것 같다. 지금까지 이렇게 다양한 논의가 쏟아져 나왔지만, 앞으로의 논의가 더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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