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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물/미셸 푸코/민음사>
우리는 그림을 바라보고, 그림 속의 화가는 우리를 응시한다. 더도 덜도 아닌 대면(對面), 갑자기 서로 마주친 눈길, 서로 교차되면서 겹치는 곧은 시선, 그렇지만 이 상호적 가시성의 가느다란 선에는 불확실성, 교환, 회피라는 시선을 포괄하는 복잡한 망 전체가 내포되어 있다. 화가의 시선은 우리가 소재(素材)의 자리에 있는 경우에만 우리에게로 향한다. 관람자로서 우리는 추가 요소일 뿐이다. 우리는 화가의 시선에 받아들여지지만 또한 화가의 시선에 의해 축출되고 우리보다 먼저 언제나 거기에 있던 것, 즉 모델로 교체된다. 그러나 역으로 화가의 시선은 그림의 바깥으로, 화가와 마주 대하는 허공을 겨냥하는 것으로서, 관람자들이 오는 그만큼 많은 모델을 받아들이는 셈이며, 그 명확하나 중립적인 장소에서 주시하는 자와 주시되는 자의 끊임없는 교환에 가담한다. 어떤 시선도 안정적이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해 캔버스를 수직으로 관통하는 시선의 중립적 궤적 속에서 주체와 객체, 관람자와 모델의 역할이 한없이 뒤바뀐다.
―p. 27
거울은 무엇보다 왼쪽에 묘사되어 있는 커다란 캔버스의 이면이다. 캔버스의 위치 때문에 감춰져 있는 것을 정면으로 온전히 보여주므로 이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표면이다. 게다가 거울은 창문과 대비를 이루고 창문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창문과 마찬가지로 거울 역시 그림과 그림에 속하지 않는 것에 공통되는 장소이다. 그러나 창문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면서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인물들, 화가, 그림과 그들이 응시하는 광경을 연결하는 빛의 연속적인 분출 운동을 통해 작용하는 반면에 거울은 격렬하고 순간적인 움직임, 순수한 놀람의 움직임을 통해, 응시되지만 가시적이지 않은 것을 찾게 하여 이것을 허구적인 깊이의 끝에서는 가시적이지만 모든 시선과는 무관한 것으로 만든다.
―p. 35
16세기의 지식은 마법과 동시에 박학(博學)을 동일한 차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보기에 16세기의 인식은 합리적인 지식, 마법의 실행에서 파생된 관념, 그리고 고대 텍스트의 재발견으로 권위가 증대된 문화유산 전체가 불안정하게 혼합되어 성립된 듯하다. 이런 식으로 이해된 16세기 과학의 구조는 취약한 것으로 보이며, 단지 고대인들의 것을 충실히 답습하는 태도, 경이로운 것에 대한 취향, 그리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지고한 합리성에 대한 이미 일깨워진 관심이 폭넓게 마주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3열(裂)의 시대는 각 작품과 각 공유된 정신의 거울에 반영될지도 모른다. … 16세기의 지식에는 마법과 박학에 대한 이해 방식이 불가결하다. 16세기의 지식에서 마법과 박학은 이를테면 수용된 내용이 아니라 요구되는 형식이다. 세계는 해독해야 할 기호로 뒤덮여 있고, 닮음과 친화력을 드러내는 기호 자체는 단지 유사성의 형태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식은 해석이 된다. 다시 말해 인식은 가시적 표지에서 출발하여, 가시적 표지를 통해 말해지는 것으로, 가시적 표지가 없다면 사물에 무언의 말처럼 잠들어 있을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된다.
―p. 66
『돈키호테』는 르네상스 세계의 음화(陰畵)를 보여 주고, 문자는 세계의 산문이기를 멈추었고, 닮음과 기호의 오랜 일치는 무너졌고, 유사성은 기만하고 망상과 정신착란으로 바뀌고, 사물은 가소로운 동일성 속에 끈질기게 머물러 있고, 즉 이제는 현재의 모습일 뿐이고, 말은 채울 내용도 닮음도 없이 이리저리 옮겨 가고, 더 이상 사물을 나타내지 않으며, 먼지에 덮인 책의 지면들 사이에 잠들어 있다. 기호 아래 은밀한 닮음을 발견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독해를 가능하게 한 마법은 이제 왜 유비가 언제나 어긋나는지를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에만 소용될 뿐이다. 예전에 자연과 책을 단일한 텍스트로 읽어낸 박학은 공상으로 치부되고, 즉 책의 누런 지면으로 가라앉고, 언어의 기호가 갖는 가치는 기호가 재현하는 것의 빈약한 허구일 뿐이다. 문자와 사물은 더 이상 유사하지 않다. 문자와 사물 사이에서 돈키호테는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닌다.
―p. 87
존재, 기호, 유사성을 분리하는 어떤 지식의 여백에서 광인은 마치 이 지식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서인 듯, 동일 의미 내용의 기능을 확보한다. 광인은 모든 기호를 모으고 모든 기호 사이에 닮음을 끊임없이 확산시킨다. 시인은 이와 대칭적인 기능을 확보하고, 알레고리의 역할을 맡으며, 기호들의 언어와 기호들의 아주 뚜렷한 특권의 작용 아래에서 '다른 언어'에 말도 담론도 없는 닮음과 언어에 귀를 기울인다. 시인은 유사성을 말해 주느 ㄴ기호에까지 유사성을 이르게 하고, 광인은 모든 기호를 결국 없애버리는 닮음으로 모든 기호를 가득 채운다. 이처럼 광인과 시인은 우리 문화의 외부 가장자리에서, 우리 문화의 본질적인 분할선에 가장 가까이 인접한 곳에서 '한계 상황을 같이하는데, 거기에서 광인과 시인의 말은 낯섦의 힘과 항의(抗議)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얻는다. 광인과 시인 사이에서 어떤 지식의 공간이 열렸는데, 이 공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제 서양 세계에서의 본질적인 단절 때문에 유사성이 아니라 동질성과 차이이다.
―p.90
오랫동안 지식의 기본적 범주였던 유사한 것이 동일성과 차이의 관점에서 분석되면서 해체되기에 이르고, 게다가 비교는 측정의 매개에 의해 간접적으로든지, 마치 동일한 층위의 것인 듯 직접적으로든지 간에 질서와 관련이 있으며, 마침내 비교는 이제 세계의 정연한 배치를 밝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명령에 따라 당연하게도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나아가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로 말미암아 서양 문화에서 에피스테메 전체의 기본 배치가 변한다. 특히 16세기의 인간이 관찰한 바처럼 친근성과 닮음 그리고 친화력이 여전히 하나의 매듭으로 묶여 있고 언어와 사물이 끝없이 교차한 경험의 영역, 이 광범위한 영역 전체가 새로운 지형을 띠게 된다. 원한다면 이 새로운 지형을 '합리주의'라는 이름으로 지칭할 수 있고, 머릿속에 기성(旣成)의 개념들밖에 없는 경우라면 17세기에야 비로소 미신적이거나 마술적인 낡은 믿음이 사라졌고 마침내 자연이 과학의 영역에 포함되기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p. 96
고전주의에 의하면 기호는 세 가지 변수에 의해 규정된다. 우선 관계의 기원에 의해서이다. 기호는 자연적이거나 관습적일 수 있다. 다음으로 관계의 유형에 의해서이다. 기호는 지시 대상에 속하거나 지시 대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끝으로 관계의 확실성에 의해서이다. 기호는 매우 일정해서 누구나 그 충실성을 확신할 수 있지만, 그저 개연적일 수도 있다. 이러한 관계의 양상들 중 어떤 것도 유사성을 필연적으로 내포하지는 않으며, 자연적인 기호 자체도 유사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p. 102
17세기부터는 자연과 관습에 반대의 의미가 부여된다. 자연적인 기호는 사물에서 추출된 하나의 요소에 불과할 뿐이며, 인식에 의해 기호로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인 기호는 고정된 것이고 탄력성이 없으며 비실용적이다. 그리고 정신은 자연적인 기호를 뜻대로 지배할 수 없다. 반대로 관습적인 기호가 확립될 경우에는, 기호가 단순하고 상기하기 쉽고 무한한 요소에 적용되고 분할되고 합성될 수 있도록, 기호를 선택하는 일이 언제나 가능하다. 인위적인 기호는 완전하게 작용하는 기호이다. 인간과 동물이 나뉘는 것은 바로 인위적인 기호에 의해서이다.
―p.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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