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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주제 있는 글/Arte。 2018. 5. 7. 18:21
자코메티의 글을 쓰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우선 미학적인 해석을 덧붙이기가 어려운 까닭이 컸고, 또한 자코메티의 작품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의 예술세계보다 그의 인생 전체를 들여다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 까닭도 있었다. 어찌보면 그의 인생 자체가 곧 그가 헌신했던 예술세계와 동일하기는 하지만. 시간이 흘러 전시회에서 내 눈을 사로잡았던 작품들을 떠올려봐도 여전히 어떤 글을 써야 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는 고정된 관념을 싫어한다. 틀에 박힌 생각이나 표현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코메티의 작품은 처음 보기에 난해했던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미술시장에서 그의 작품이 평가받는 가치나 예술계에서의 위상이 매우 높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내 미적 안목이 형편없는 건 아닌가 생각했었다.
자코메티라는 조각가를 안 것은 대학 시절 현대중국 예술가를 조사하던 중이었다. 볼품없는 입상(立像)이 천문학적인 가격에 낙찰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뭐 이런 예술가, 이런 작품이 다 있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 관람을 통해 그의 작품을 두 눈으로 직접 접하면서 내 뇌리에 무의식 중에 각인되어 있던 고정관념을 아차 하고 느꼈다. 빈 저금통이라고 생각하며 흔들어보았는데 기대치 않게 몇 개 동전이 쟁그랑거리는 것처럼.
실제로 그의 작품은 아름답지 않다. 마치 피카소의 그림을 보며 기괴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뭔지는 몰라도 격조 있는 예술을 감상하러 와서 막상 앙상한 몰골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영 생경하기만 하지만, 사실 이들의 작품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릇된 접근법이라는 것. 그럼에도 소위 '예술'을 즐기러 온 나의 기대치(고정관념)는 이를 알면서도 무시하기가 쉽지 않다.
나의 경우 볼품없는 작품의 형상보다는 그 작품이 그 작품 같아 보여서(작품간 구별이 뚜렷하지 않아서) 관람하기가 힘들었는데, 여하간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의 현대미술은 고전미술에서 규정하던 미(美)라는 틀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전적인 예술이 수행해 왔던 미(美)의 재현은 사진의 등장과 함께 그 역할을 끝마쳤다. 사진은 회화(繪畵)보다 더욱 사실적이고 더욱 생생하게 현실세계를 묘사한다. 원하기만 한다면 사후에 촬영자의 의도에 따라 채도나 명암을 간편히 조절할 수도 있다.
요컨대 예술이 이제 수행해야 할 역할은 '관념(觀念)'을 표출하는 것이다. 또는 시대정신(zeitgeist)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자코메티의 창착과정이나 작품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바라본 세계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사이에 접점을 찾아가는 일이다. 이 전시회 또한 그러한 의도에 따라 기획되었고, 자코메티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던 6명의 뮤즈(muse)마다 섹션을 따로 두고 있었다.
자코메티와 그의 가족(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그의 형제들; 디에고, 죠반니, 오틸리아, 아네타)
1. Vanitas 生의 덧없음
전시회에서 진행된 도슨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스무 살의 자코메티가 경험한 어느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코메티는 이탈리아 여행중 폼페이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반 뫼르스라는 네덜란드인 노신사를 만나 짧게 대화를 나눈다. 여행 직후 네덜란드 노신사는 신문의 광고란에 '여행 중 만난 청년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글을 올리고, 이를 계기로 자코메티는 노신사와 함께 베네치아에 동행하게 된다. 여행비용을 모두 책임지겠다는 노신사의 제안이 어린 자코메티에게는 솔깃했을 것이다. 그러나 웬걸 노신사는 허무하게도 여행 이튿날 숨을 거두고 만다. 간밤 고통에 괴로워하는 노신사를 지켜보며 어린 자코메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경험한 첫 죽음이었다.
개인적 경험은 자코메티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무상함을 깨닫게 했다. Memento mori.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죽음은 자코메티에게 그리 멀지 않은 것이었고, 늘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죽음이 없다면 삶이 없고,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다. 그러고 보면 메멘토 모리는 현재의 삶을 소중히 여기라는 Carpe Diem과 맥락이 같다.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그의 집요함은 그의 작품세계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어, 그는 껍데기를 걷어낸 삶의 본질을 묘사하는 데 매진한다. 자코메티의 스케치에서 눈―그에게는 시선이 사람이 살아 숨쉰다는 증거로 여겨졌다―에 유달리 선(線)이 집중되어 있는 점, 그의 조각이 점점 왜소해지고 작아지는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나 색채도 그리 다채롭지 않다. 죽음 앞에 모든 이는 패배자라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삶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모든 요소를 제거해야 했던 것이다.
사실 자코메티가 살아간 19세기에 죽음은 개인적 경험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과정에서 대량살상을 통해 사람들은 무의미한 죽음을 집단적으로 경험하게 되었고, 이러한 시류 속에서 예술계에서는 다다이즘이라는 비판적 사조가 등장한다. 폭발적이었던 전쟁의 광기는 역설적이게도 그 무엇보다 인간 소외와 삶의 무가치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이는 자코메티의 세계관 그리고 예술관에 고스란이 베어든 것으로 보인다. 사상계에서는 실존주의가 대두되던 당시 사르트르와의 교제 역시 그의 창작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사뮈엘 베케트의 실존주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연극무대를 연출하는 데 참여하기도 한다.
2. L'amour 그의 戀人
그에게 뮤즈가 되어준 사람은 때로는 친구이기도 했고 때로는 연인이기도 했다.
뛰어난 예술가들은 대개의 경우 고흐처럼 자학적이든 피카소처럼 나르시시스트이든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자코메티는 평생 불을 끄고서는 잠을 못들 정도로 불면증에 시달리며 작업에 매달렸다는 점에서 자학적인 면이 있지만, 여러 연인들을 두었다는 점에서는 여느 예술가들처럼 꽤 자기애적인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 부인 아네트와의 결혼 중 만난 캐롤린에 심취한 나머지, 자신의 임종을 눈앞에 두었을 때조차 아네트 대신 캐롤린을 옆에 두었다고 한다.
예술 이외의 활동―물론 부인 아네트에게 선물하는 것을 포함해서―에 돈을 쓰는 데 인색했다는 자코메티가 캐롤린 앞에서는 보석이며 고급차며 사족을 못 쓰고 흥청망청 돈을 썼다고 하니, 아내 아네트로서는 무척 서운했을 법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코메티의 일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어준 인물이 그의 동생 디에고와 더불어 아내 아네트였다는 점은 자코메티가 만든 작품들이 묘사한 대상을 보아도 알 수 있거니와, 어쨌든 자코메티의 법정 상속인은 아네트였던 만큼 그녀는 자코메티가 살아 생전에 일궈놓은 부와 명예를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었다. 또한 평생 자코메티의 뮤즈가 되기를 자처했던 아네트는, 상속받은 작품들을 단순히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삼는 대신, 그의 예술을 알리고 예술재단을 관리하는 데 헌신했다고 하니 자코메티 못지 않게 강단깨나 있는 인물인 것 같다.
통념상 참 불가해한 것은, 그런 그녀에게도 사실은 결혼중 내연관계의 남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상대는 바로 자코메티의 절친이었던 소르본 대학 소재의 일본인 철학자 이사쿠 야나이하라(伊作矢内原). 장 폴 사르트르의 소개로 야나이하라―그는 일본에 처음으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을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를 만난 자코메티는 동양적인 생김새와 모델로서 미동없이 자세를 취하는 그에게 매료되었다고 한다. 통념상으로 더욱 불가해한 것은, 자코메티가 이들의 애정관계를 알면서도 묵인하고 오히려 반기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들의 사고체계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코트를 뒤집어 쓴 채 빗길을 걸어오는 자코메티, 앙리 브레송이 촬영한 결정적 순간이다
삶의 한가운데 그가 느끼는 고독이 전해지는 것 같다
디에고 자코메티
3. Ses amies 그의 親舊들
유별난 성격을 지닌 자코메티이지만, 또한 사교를 좋아하는 달변가였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내성적인 심성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동생 디에고와의 관계다. 한평생 고흐를 뒷바라지한 그의 동생 테오처럼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남동생 디에고 역시 그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단연 자코메티의 작품에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에게 든든한 남동생의 존재는 그가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디에고는 자코메티가 예술적으로 부담없이 해부할 수 있는 피실험대상이자 언제나 새로운 시선을 던질 수 있는 친구였다.
디에고는 자코메티가 원하면 수천 수만 번이고 기꺼이 모델이 되어주었을 뿐 아니라, 세계대전 당시 자코메티의 작업실이 자리했던 파리가 나치군에 점령되었을 때에도 고향 스탐파로 돌아간 맏아들 자코메티를 대신해 작업실에 남아 작품을 지켰다. 자코메티가 죽는 순간까지 자코메티의 분신과도 같았던 마지막 작품을 간수했던 것 역시 디에고였다. 디에고는 자코메티에게 남동생이기도 했지만, 친구였고 팬이었던 셈이다.
자코메티가 조각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처럼 당시 회화계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었다. 두 차례 대전을 거치며 폐허더미가 된 유럽사회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고, 자코메티가 그러한 시류에 동참한 것처럼 회화계도 일련의 격변을 겪는다. 정육점에 진열된 고깃덩이처럼 인간을 묘사한 프랜시스 베이컨은 영국 예술계에서 일약 스타로 떠오르고 있었고, 그보다 앞서―자코메티보다 연배가 더욱 위이기도 한―피카소가 입체파라는 사조를 이루며 현대미술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눈에 띄는 작품 활동을 통해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있던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이들과 종종 교류를 했고, 특히 현대미술의 거장이라 일컬어지는 피카소와는 잦은 교류가 있었지만 꽤 소원한 관계였다고 한다. 즉흥적이고 열성적인 성향의 피카소는 부와 명예 생전에 모두 누린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질투심 또한 어지간했던 모양이다. 그는 자코메티의 작품을 평가절하하면서도 막상 자코메티가 의견을 낼 때는 귀기울여 듣는 치기어린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일종의 라이벌 의식을 지닌 피카소에게 자코메티는 질투를 부추기기보다는 과묵하게 자신의 작업에 매진했다고 하는데, 각종 스캔들과 함께 인물 자체로도 유명해진 피카소와 달리 무던한 자코메티가 대중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건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프랜시스 베이컨
글쎄 전시장을 나서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마지막으로 빙 돌며 감상한 ‘걸어가는 사람’도 디에고가 마지막까지 애지중지 간수했다는 그의 유작도 아니었다. 오히려 기억에 남는 건 절실하게 고독한 자코메티의 눈빛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화가얐던 아버지로부터 ‘올바로 보는 법’을 배워왔단다. 그래서일까 단순한 스케치 작업에서도 살을 붙이이는 (자코메티의 경우 덜어내는 작업이 더 많았지만) 조소 작업에서도 대상의 시선을 처리하는 데 매달렸다. 또한 런던의 테이트 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리기 직전까지도 작품을 마무리하는 데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집요하게 무언가를 절실하게 좇는 그이 눈빛, 그 눈빛을 잊지 못해 지금도 회사의 사무실에 자코메티가 동생 디에고, 아내 아네트와 함께 찍은 사진을 붙여두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진짜 인간을 갈구했던 사람. 자코메티는 어느새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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