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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주제 있는 글/Arte。 2019. 8. 10. 01:39
세차게 비가 내리는 주말이었다. 오전 시청 옆 카페에서 프랑스어를 두 시간 좀 넘게 공부한 뒤 향한 곳은 서울시립미술관. 국내에서 모처럼 관람객을 끌어모으고 있는 전시, <데이비드 호크니 展>을 보기 위해서였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 비하면 협소한 편이라, 관람객이 몰려들면 전시 대신 사람만 구경하고 올 것이 분명하리라 예상은 했다. 그래도 비가 오는 날씨다보니 관람객이 적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 섞인 생각에 비해 매표소에는 꽤 사람들이 붐볐다. 그리고 두 시간 후 미술관을 빠져나올 즈음에는 날씨도 개어 있었고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전시를 관람하기 위한 대기열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_=
데이비드 호크니는 개인적으로 마구마구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다. 어디서였던가 자본주의 속 일상의 풍경을 현대적인 기법으로 풀어냈다는 서평을 읽은 뒤로 어쩐지 밋밋하고 평범한 작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데이비드 호크니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럿 만났었다. 대학시절 도슨트로 같이 일했었던 형이 그랬고, 한 번은 소개팅에서 만난 여성이 데이비드 호크니를 좋아한다고도 했다. 심성이 비뚤어진 건지 나는 기본적으로 형상을 뭉개 놓은 현대미술 작품들을 대체로 좋아한다. 하지만 피카소처럼 시점을 분열시켜 놓은 것이 아니고, 프랜시스 베이컨처럼 적나라하게 뭉개 놓은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적절히 안배되어 뭉개진 인물과 사물은 사실적인 그림보다 더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여하간 이러니저러니 해도 데이비드 호크니는 데이비드 호크니다. 이 정도 규모로 그의 작품이 내한한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어느 정도 컬렉션이 전시되었는지는 몰라도 놓칠 수야 없는 법이다. 전시를 보면서 한 가지 깨달은 점은 데이비드 호크니가 선택하는 색깔들이 샤갈에 비견될 만큼 탁월하다는 것이다. 담백하면서도 선명한 그의 화풍은 정돈된 선과 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개성있는 색감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의 에칭화보다는 색감이 좀 더 묻어나는 아크릴화들이 단연 시선을 잡아끌었다. 특히 마지막 전시실에서 수십 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여 만든 대작들은 가히 압권(壓卷)이었다. 왜 오늘날 그의 이름이 이토록 회자(膾炙)되는지 실감할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여전히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필름카메라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진의 등장 이후 회화가 넓힐 수 있는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진작품을 보고 와서 쓸데없이 필름카메라를 한참 검색해 보았다..=_=) 그런 그가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작품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는 점, 피카소의 죽음에 감화되어 오마주의 일환으로 연작(連作) 활동을 했다는 것은 그에 관하여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데이비드 호크니라는 개인이 그를 에워싼 사회와 공명(共鳴)하며 잠시나마 보는 이를 색다른 세계로 안내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진정 대단한 일이다.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며 자기 자신을 예술로 승화한 데이비드 호크니가 대단히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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