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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킨 소로야(Joaquín Sorolla y Bastida)주제 있는 글/Arte。 2018. 7. 24. 00:01
Sea Idyll
아주 어릴 적부터 그림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훨씬 전부터 선을 그어 형상을 만들어내는 일에 빠져들곤 했다. 그 때에야 물론 그림도 단순하고 낙서에 지나지 않는 것들도 많았다. 정규학교에 들어간 뒤로도 미술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업이었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에는 잠시나마 그림 그리는 일을 꿈꾸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한 번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유화로 따라 그린 적이 있다. 아무런 창작 없이 그저 색감과 질감을 재현(再現)하는 과정이었지만, 그 자체로 흥미로웠다. '가장' 좋아하는 미술가랄 건 지금도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당시 내가 좋아했던 작가는 고흐였다. 고갱과의 불화로 한쪽 귀를 자른 미치광이라는 스토리도 고흐로부터 남다른 인상을 받은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남들처럼 수험생활에 나 자신을 끼워맞추는 동안 미술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도 가끔씩 관심가는 전시회를 들르며 '내가 좋아하는 일 중에 하나가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지' 하며 새삼 깨닫곤 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대학 때에는 고등학교 때 못지 않게 열성적으로 스펙을 쌓는데 여념이 없었던 것 같다. 여하간 그림을 보며 벅차다고 말해도 될 만큼 유쾌했던 순간이 다시 찾아왔으니, 졸업 후 잠시 남는 기간을 이용해 스페인에 갔을 때였다.
이 역시 다시 생각해보면 분에 넘치게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부모님께 손벌리지 않으려 애썼던 나인데 당시 철없게도 대뜸 스페인 여행 자금을 대달라고 했다. 부모님은 그러마하고 지원해주셨고, 비행기 예약방법도 잘 모르던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무려 두 번이나 스탑오버를 해야 하는 티켓을 구했더랬다. 그런 시간과 비용을 감수하면서도 3주가 채 안 되는 그 기간 동안 모든 게 즐거웠었다.
스페인에 있는 동안 미술관을 참 많이 갔다. 닥치는 대로 미술관에 들어갔던 것 같다. 마드리드에 있을 때에는 마드리드의 3대 미술관이라 불리는 프라도, 티센 보르네미사, 레이나소피아를 다 둘러봤고, 바르셀로나에서는 피카소 미술관과 몬주익 공원의 야트막한 언덕길에 자리잡은 호안 미로 미술관도 갔다.
우연히 호아킨 소로야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그라나다, 그것도 알함브라 궁전에서였다. 알함브라 궁전에도 위 미술관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미술관이 있다. 그의 작품은 출구로 향하는 작은 문 옆에서 발견했다. 어찌 보면 인상주의풍의 그림이지만, 여느 인상주의 작품과는 동일한 범주로 묶어버리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흐, 모네, 마네, 르누아르.. 모두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인상주의 화가들이다. 때로는 푸근한 전원풍경을, 때로는 귀족의 우아함을, 때로는 과묵하게 석양을 담안던 화가들이다. 다 저마다 각자의 색깔을 갖고 있고 특히 고흐의 작품은 여전히 좋아한다.
반면 내가 소로야의 작품에서 곧장 느꼈던 것은 바로 생명력이다. 내가 원했던 것은 이러한 생(生)의 드러남이었다. 저 바다는 코발트가 아니면 터키옥, 그것도 아니면 인디고인가. 황톳빛 모래사장에 반사되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도 까맣게 잊은 채 생동하고 있는 아이들. 저 아이들은 결코 멈출 것 같지 않다. 지금의 활기를, 지금의 삶을.
알함브라에 있던 당시 수첩을 따로 챙겨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눈으로 화가의 이름을 암기해 두었다. 사실 좀 더 주의깊게 관람을 했더라면 분명 프라도 미술관 같은 곳은 소로야 작품 정도 하나는 소장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도 좀 더 일찍 알았을 것이다. 여하간 그마저도 알파벳을 잘못 기억했는지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소로야라는 인물과 그의 작품을 검색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 이 작가가 불현듯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이 작가가 내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 순간 글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이기에, 그토록 삶에 집착하면서도 바로 그것 때문에 괴로워 하는 걸까. 오늘 아침 한 정치인의 비보(悲報)를 들었던 때였던가? 삶을 이해해보려 했던 것이. 이제는 새로운 것들(news)에 염증마저 든다. 소로야의 작품은 티없이 맑은데, 이미 어른티를 풍기는 내 마음은 그저 혼탁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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