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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의 한국미술주제 있는 글/Arte。 2020. 5. 25. 00:35
가뭄에 단비 오듯 모처럼 전시회가 열렸다. 그것도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귀중한 현대미술품이 모였다. 오후 반차를 낸 어느 날 갤러리 현대 개관 50주년 展에 다녀왔다. 우리나라 미술 전시회를 여러번 다녀봤어도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이만큼 공개된 장소에 가는 건 처음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전시회를 보겠다고 따로 휴가를 낸 것은 아니고, 휴가를 낸 겸해서 마침 전시회가 생각나 화랑(畵廊)이 있는 사간동으로 향했다. 삼청동과 인사동, 사간동이 만나는 안국역에 내린 게 참 오랜만의 일이다. 직장인들이 퇴근하기 이전인 평일 오후인데도 제법 대기줄이 있어서 30분 가량 밖에서 입장을 기다렸다.
나는 2층이 한가하다는 직원의 안내대로 2층을 먼저 들렀다. 입구의 오른 모서리로 돌면 가장 먼저 시선에 들어오는 건 곽인식의 작품이다. 예전에 도슨트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서 어떤 작가들―서세옥, 장욱진, 최영림, 박수근, 이중섭―의 작품들은 낯설지가 않다. 이응노의 작품은 대전에 사는 동안 한밭수목원에 있는 이응노 미술관에서 한껏 본 적이 있다. 김기창, 김창열, 이우환의 작품은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리움미술관처럼 큰 미술관을 가도 얼마든 관람할 수 있다. 천경자 화백의 경우 서울시립미술관에 별도의 상설전시 공간이 있으니 부연할 게 없다. 무료로 열린 이 전시회에서는 이러한 까닭으로 그동안 잘 모르고 지냈던 곽인식 같은 작가의 작품에 더 시선이 갔다. 그래서 전시회에서 마음에 들었던 작품을 꼽자면 곽인식, 유영국, 성재휴 화백의 그림 정도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변관식의 동양화는 물론 압권이었다.
전시회는 신관과 구관으로 나뉘어 열리는데, 신관을 먼저 들러야 구관을 관람할 수 있다. 나 같은 경우 구관의 전시규모가 그리 크지 않을 거라 지레짐작한 나머지, 신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구관의 좋은 작품들을 세심히 보고 나니 진이 다 빠져버렸다. 그만큼 구관에는 신관 이상으로 값진 작품들이 꽉 차 있다. 처음에는 어떤 색이 쓰였는지를 본다. 다음으로 형(形)을 살핀다. 그리고 구도와 배치를 조망한다.
각 전시관은 나름의 컨셉이 있다. 신관은 서양화 중심으로 전시가 되어 있는데, 2층에는 70년대 이후에 활동한 작가들의 현대작품이 추상화 위주로 전시되어 있다. 한켠으로 벽감(壁龕)처럼 움푹 패인 공간에는 <우주>를 비롯해 이우환 화백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심도 있게 감상할 수 있고, 당대에 만들어진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저돌적인 색감을 사용한 유영국 화백의 작품 또한 전시실의 벽면 한쪽을 차지하여 시선을 뺐는다. 1층으로 내려오면 백남준의 <마르코 폴로>가 다채로운 꽃과 함께 화사하게 전시되어 있고 지하 1층에는 모노크롬 위주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법한 김창열의 <물방울>과 이우환의 <점으로부터> 연작이 있다. 한지를 활용한 박서보 화백의 실험적인 필법은 또 다른 볼거리이고, 두 개의 화강암과 녹슨 철판으로 구성된 이우환의 <관계망>을 360도 회전하며 보다 보면 정말로 인간의 관계를 헤아려보는 것 같다.
구관에는 동양화 위주로 전시가 되어 있어서 전통적인 수묵화를 창의적으로 재해석한 성재휴 화백의 작품도 있고, 예술혼을 불살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변관식의 수묵화도 있다. 전시실의 초입을 장식하고 있는 <하와이 가는 길> 속 천영자 화백의 수채화가 청아하게 구관으로 길을 이끄는 한 편, 황소를 묵묵히 그려낸 이중섭의 작품은 도무지 질리지 않는데, 유달리 <통영 앞바다>라는 그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기와 빛깔의 바다는 물론이고, 을씨년스러운 소나무의 잔가지들이 꼭 우리나라의 겨울 풍경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변관식 화백의 작품 뿐만 아니라 필름카메라로 묘사한 듯한 도상봉 화백의 작품을 보면서는 참 한국적인 경치, 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서양화와 동양화의 구별은 현대화랑이 최초로 시도했던 서양미술 전시관과 동양미술 전시관의 구분을 되살리기 위한 취지일 것이다. 이날 봤던 작가들의 작품은 아무리 다시 구글링해보아도 직접 보는 것만 못하다. 지금 같은 시기에 개관 50주년을 기념해야 하는 미술관도 고심깨나 깊었겠지만, 관람객으로서는 마주하기 쉽지 않은 작가의 마주 하기 쉽지 않은 작품을 접하니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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