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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루스트와 베이컨주제 있는 글/Arte。 2021. 1. 6. 20:12
프랜시스 베이컨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 질서정연함이나 합리성으로부터 온갖 종용을 받는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 같다. 모든 게 제 위치에 놓여 있지 않고 뒤죽박죽 난도질되어 있다. 색도 마음에 드는 톤의 빨강이다. 그래서 평소 프랜시스 베이컨에 대한 글을 하나 남기고 싶었는데, 좋아하는 작가여서인지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 어느 한 서점의 화집 코너에 들렀다. 그리고 비닐로 꽁꽁 포장되지 않은 덕에 마음 편히 펼쳐볼 수 있는 화집들을 뒤적이다가 제라르 갸루스트—Gérard Garouste, 한국어로 이렇게 옮기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의 그림을 접했다. 그리고 그의 그림에서 순간적으로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실루엣이 보였다. 다음으로는 어찌된 일인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이 연상되었다.
갸루스트의 그림에서 베이컨의 그림이 떠올랐던 건, 아마도 둘 모두 화풍이 초현실주의적이고 괴짜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또 육체를 압착시키거나 절단시키고 예측불가능한 방식으로 왜곡—과장 또는 생략—시키는 방식까지도 비슷하다. 그런데 그 부분을 뺀다면, 이 두 작가가 쓰는 색감이나 구체적인 형태 면에서는 공통점랄 게 없다. 베이컨은 살덩이를 연상시키는 다홍, 빨강, 눅눅한 베이지색, 핑크를 과감하게 쓰는 반면, 갸루스트의 그림은 대체로 무채색 베이스의 차분한 바탕에 겨자색, 올리브색, 또 같은 빨강이라도 버건디 느낌의 좀 더 가라앉은 색을 즐겨 칠한다. 형태 면에서는 베이컨의 그림이 보다 추상적이지만, 바로 그런 추상성 때문에 베이컨이 나타내려고 한 살덩이가 도드라진다. 반대로 갸루스트의 그림에서는 내러티브가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앙시앙 레짐’에 대한 현대판 풍자라든가, 파우스트와 단테의 신화에서 따온 구체적인 형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적나라함은 덜한 대신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작품을 ‘읽어야’ 한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갸루스트 그림에서 베이컨의 그림으로 연결 짓기 위해서는, 다시 프란시스코 고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제라르 갸루스트(Gérard Garouste), 프란시스코 고야(Francosco Goya),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이 세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느낌’은 형용하기 힘든 기괴함(absurd)이다. 시대 순서로 인물을 보자면 고야(19세기)와 베이컨(20세기)은 죽음이나 삶의 어두운 측면을 꿰뚫기 위한 작품 활동을 했다. (아주 거친 구분에 따른 예술사조로 볼 때) 다만 고야는 인상파의 첨단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입체파의 한복판에서 활동을 했고, 그런 시대적인 특징이 다소간 묻어날 뿐이다. 이후 갸루스트(21세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클래식한 주제—세르반테스나 카프카, 그리고 라블레의 문학을 포함하여—로 회귀하여 좀 더 섬세한 테마를 갖고 색과 이미지를 깨뜨리기 시작한다. 현대사회에서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이미지들의 농간을 반박하기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어쨌든 이 모든 것들은 이미지로 보나 색으로 보나 적절치 않아(absurd) 보인다.
결국 갸루스트의 그림이 고야의 작품과 맞닿아 있는 것은 ‘주제’이고, 베이컨의 작품과 맞닿아 있는 것은 ‘기법’이다. 실제로 제라르 갸루스트의는 자신의 작품에서 중추를 이루는 것이 ‘주제(subject)’라 밝힌 바 있고, 그에 관한 인터뷰를 찾아보면 엘 그레코(<프랑스의 왕 성 루도비코>), 틴토레토(<복음사가 마크 시신의 납치>), 프란스 할스(<복음사가 마크>),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고야 등의 작가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도 말한다. 언급된 작품들은 모두 인물의 초상화이거나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음침한 인물들의 표정이나 풍경의 색채가 제라르 갸루스트가 자신의 그림에서 표현하는 느낌과 닮았다. 다만 앞선 이들 작가는 아직 사실주의에 천착해 있었던 데 반해, 제라르 갸루스트는 엉뚱하게 도치(倒置)된 육체들과 판타지적인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래서 이미지의 해부를 시도했던 프랜시스 베이컨 역시 떠올랐던 게 아닐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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