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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 사진 展주제 있는 글/Arte。 2020. 7. 17. 02:38
월요일을 앞둔 일요일 밤이 되면 소파에 앉아 심드렁하게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본가에서 보내는 일요일 밤은 늘 무언가를 하기에 애매한 시간이다. 그런데 뉴스 막간에 쏠쏠한 문화소식이 실려 있다. 이번 주는 <퓰리처상 사진전>이 소개된다. 휴가를 낸 수요일 오후, 냉장고처럼 에어컨을 튼 파란 버스를 타고 예술의 전당으로 향한다.
<퓰리처상 수상전>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것이 세 번째라는데, 그러고 보면 내가 사진전을 본 적이 있기는 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본 적이야 있었을 테지만, 아마 이 정도로 큰 규모로 열리는 전시회는 처음이다. 정류장에서 내려 냉면 한 사발을 비우고 난 뒤에야, 샹젤리제 풍으로 가지치기된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을 따라 한가람 미술관으로 향한다. 한여름 반포대로의 가로수는 특히 근사하다.
미술관을 일 년에 몇 번이나 가겠냐마는 사진전 치고는(?) 가격이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인 기준 입장료 15,000원+오디오 가이드 3,000원=도합 18,000원) 도슨트가 없는 대신 오디오 가이드에 설민석 씨를 섭외했고 전시장의 요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입구와 출구에는 비디오아트 형태로 제법 규모 있게 공간을 꾸며 놓았다. 가격 결정이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8,000~10,000원 정도 하던 10여년 전 입장료를 생각하면 인플레이션을 감안해도 가격상승이 가파른 건 맞는 것 같다. (얼마 전 현대갤러리를 무료로 관람해서 더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ㅠ) 그리고 만족도만 놓고 보자면..결론은 좋았다는 것! =_= 사진전을 가볍게 생각했는지 금방 쓱 둘러볼 줄 알았는데, 나중에 시간으로 따져보니 전시장 안에 3시간이 넘게 있었다.
전시회를 보면서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지만, 이 전시회는 앙리 브레송(Henri Bresson)의 <결정적 순간>과 같이 사진의 미학을 소개하기 위한 목적의 전시회가 아니고, 보도사진을 관람객들이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곳이다. <퓰리처상 사진전>이니까 새삼 당연한 사실이면서도, 전시회에 소개된 사진들을 받아들이고 온전히 이해하기까지는 버퍼링이 걸렸다. 사실 이보다도 더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던 건, 으레 전시장에 오면 ‘그림’을 감상하는 게 버릇이 되다보니, 순간을 포착한 사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헷갈렸다는 점이다. ‘그림’이 아닌 ‘사진’, 그것도 ‘보도사진’. 사람들에게 객관적 사실을 알리기 위해 촬영된 사진.
분명 나를 혼란에 빠뜨린 작품이 하나 있었다. 1976년 스탠리 포먼(Stanley Forman)에게 퓰리처상 수상을 안겨준 <화재 탈출(Fire Escape Collapse)>이라는 사진이다. 이 사진은 1975년 7월 22일 당시의 상황을 똑 떼어다가 박제(剝製)해 놓고 있지만, 이것이 현재인지 과거인지 미래인지 갑자기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이 사진은 분명 과거시점의 사건이지만, 찰나가 현시(顯示)된다는 점에서는 살아 있는 현재다. 보도사진의 특성상 사진 속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신문지면에 설명된다는 점에서, 나는 이 사진의 다음 상황을 모두 안다. 즉 나는 과거 속 미래를 안다.
잠깐 전지적 관점에서 사진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내가 아무런 주석(註釋)도 없이 이 사진을 봤다면 무엇을 떠올렸을까? 절체절명의 상황이라는 건 모자의 표정을 통해 감지할 수 있지만, 이들이 건물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화재 때문인지 강도 때문인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이 몇 층에서부터 추락을 하는 중이며 어떤 치명적 위험을 눈앞에 두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또 이 사건이 뉴욕의 어느 호텔 건물에서 발생했는지 아바나의 빈민가에서 발생했는지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사진이 신문에 게재됨으로써 우리는 자초지종을 안다. (사건은 보스턴의 주택가에서 대형화재로 인해 인명피해를 낳았다)
사진을 찍다보면 뷰파인더에 눈물이 차오르는 걸 느낄 때가 있다는 어느 사진기자의 회고처럼, 업(業)의 윤리적 문제―먹잇감을 노리는 독수리 앞에서 굶주려 고꾸라지는 소녀를 보면서 아이를 구하지 않고 사진을 남기는 게 과연 올바른 행위였는가―에 괴로워하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어느 사진기자의 고뇌처럼, 이런 순간들을 포착하는 사진기자들이 견뎌야 할 육체적·정신적 부담이 어느 정도일지 일반사람은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파괴를 향해 질주하는 여 종군기자의 이야기를 담은 <라우더 댄 밤즈(Louder than bombs)>라는 영화가 갑자기 떠올랐다. 이자벨 위페르가 바라본 망가진 세계와 렌즈를 향한 텅 빈 동공.
퓰리처상이 1917년도에 제정되었다고 하는데, 1940년대에서 2020년까지를 아우르는 이번 사진전에서 간추릴 수 있는 키워드는 다음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종차별, 냉전(冷戰)과 반전(反戰), 중동문제. 수상작들이 포착한 순간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아름다운 장면보다는 위험천만하거나 죽음을 무릅쓰거나 또는 죽음이 임박한 사진이 대부분이다. 또 아슬아슬한 순간이 아니더라도, 그 순간을 통과한 사람들이 견뎌야 하는 트라우마, 신체장애, 격앙된 감정이 담기기도 한다.
마약을 둘러싼 남미국가의 내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쿠바 미사일 위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르완다 대학살, 라이베리아 내전, 소말리아 내전, 코소보 인종청소, 리비아 내전, 시리아 내전, 카슈미르 봉쇄, 미얀마의 로힝야족 박해, 홍콩 시위진압까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거론되던 시점에 벌어진, 그리고 사진이 담아낸 전쟁과 폭력만 해도 이만큼이다. 여기에 아이티를 덮친 지진이나 에볼라 같은 자연적인 재해는 물론이거니와, 캄보디아의 보트피플이나 중국의 천안문 사태처럼 취재진의 접근이 철저히 제한되었던 사건들을 덧붙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도륙(屠戮)이라는 인간의 악취미는 도대체 언제나 되어야 끝이 날까 진저리가 난다.
베트남 전쟁에서 두 다리를 잃은 전역장병이 시가지 행렬을 보며 우는 장면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화제성이 더욱 강한 다른 사진과 비교하자면, 처연한 표정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전역군인의 사진은 그리 눈에 띄는 편도 아니었다. 사진 속 인물과 접점이라 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순간 마음이 크게 동요(動搖)했다. 앞서 쭉 봤던 사진들에서 느꼈던 공포감, 절규, 비명, 죽음의 그림자 때문인지도 모른다. 두려움을 방패 삼아 셔터를 누른다는 어느 사진 기자의 말처럼,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들은 기자가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담아낸 것이다. 때문에 포착된 각각의 순간이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 다른 존재를 담고 있더라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미술관을 나설 즈음에는 한낮의 뙤약볕이 무르익어 홍시 같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걸을 때마다 후텁지근했던 공기도 솜사탕 조각처럼 부드럽게 찢겨나간다. 만원버스는 퇴근길 반포대로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잠수교로 내려온 버스는 앞으로 달리는 동안 석양 속 한강을 파노라마로 펼쳐 보인다. 파노라마 속 한강은 양 옆으로 빛 바랜 빌딩들을 끌어안은 채 완전히 정지해버린 것 같다. 사진을 한꺼번에 많이 본 탓이다. 보도사진 속 삼엄한 세계가 진실인지 이 멈춰버린 풍경이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해가 저무는 방향에서부터 쌓인 피로를 덜어내려 하는 도시의 풍경이 마음에 들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풍경이 진실이기를 바랄 뿐이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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