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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 문래(文來)주제 없는 글/印 2020. 2. 27. 00:10
지금은 아파트숲이 들어선 곳에 예전에는 커다란 방직(紡織)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문래(文來). 그래서일까 한자로 된 이곳 지명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산업화를 견인했던 어느 도구의 명칭—물레—과 발음이 똑같다. 부산 동래(東萊)의 '래(萊)'가 '명아주'라는 뜻을 담고 있는 데 비해, '오다'라는 의미의 행위 또는 추상적 개념을 나타내는 '래(來)'라는 글자는 이름에 섞이기에는 다소 거창한 느낌이고, 그래서 그런가 '물레'라는 이름을 한자로 차음(借音)했다는 어느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 설명을 문래역 7번 출구에서 멀지 않은 창작촌 입구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 지리에 익숙치 않은 나로서는—이곳에는 도시재생이 한창이던 2010년대 초반에 한 번 온 적이 있다—어마어마한 부지에 방직공장이 있었든 또는 천장 높은 방직공장이 있었든 사실 더듬어 볼 기억이랄 게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예의 방직공장 터에는 광고에도 종종 등장하는 브랜드를 단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데, 워낙 신식 건물이어서 구시대의 유산이 되어버린 방직공장이 사라진 게 시간상으로 불과 몇 년 전의 일인가 추측만 해볼 뿐.
집에서 그리 교통이 편한 위치에 있지 않은 문래에 들른 건—심지어 멀기까지 하다—순전히 가보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충동 때문이었다. 정말 어쩌다 문래라는 생각에까지 흘러들었는지는 글을 쓰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홀가분하게 길을 나서고 싶은 생각이었으니 무거운 DSLR 카메라도 필요 없었고, 그렇다보니 소소한 출사라 여기며 휴대폰에 담은 정사각형 사진들이 전부다. DSLR 카메라를 챙겨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한들 '자유'롭고 싶었던 나는 셔터를 누르는 동작마저도 거추장스럽게 느꼈을 거다. 휴가철도 아니지만 나는 짧지 않은 유급휴가를 내고, 카스티야 라 만차 대신 이렇게 문래동의 골목골목을 산초Sancho도 대동하지 않고 쏘다니는 것이다.
여하간 이곳에 방직공장은 사라졌지만 소규모의 철공소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로 다른 간판을 걸고 있으나 가게의 외양을 봐도 안을 들여다봐도 이 잿빛 가게들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지난 번 방문에서 느꼈던 단단한 철의 재질과 흠없이 제련된 매끄러운 철의 표면을 떠올리며, 이를 다루기 위한 도르레며 절삭기들을 망연히 바라본다. 평일 낮이라 한창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요즘 같은 시기에 마스크도 끼지 않고 분주하게 장비를 다루는 모습을 보다보니 마치 호경기를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인다.
발길이 이끄는 대로 아틀리에나 갤러리라도 들어가보고 싶었지만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된 공동작업실 밖에 발견하지 못했고—물론 미리 안내 책자든 인터넷 정보든 찾아봤으면 됐겠지만 그런 수고를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카페에 들어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에 성의없이 시선을 던졌다. 러스트 카페(Rust Cafe). 비록 주변이 재개발됨에 따라 문래동 일대가 오래된 섬처럼 둥둥 떠 있는 신세가 되었음에도, 이곳 창작촌을 미국의 러스트 벨트에 빗댄 발상이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사리 문래에 닿았는데 정작 이곳에 머무른 시간이 길지는 않다. 나는 오면서 제대로 지나치지 못한 구 문래지역(Old Mullae)를 부러 가로질렀는데, 철공소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작업—용접, 절삭, 자재이동 등등—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정확히는 뚫어져라 응시를 한 것이 아니라 걸어가며 흘낏 넘어본 정도지만. 어쩐지 이들의 생계 현장을 구경거리처럼 재미 삼아 보는 것이 무례한 행동이다 싶어, 허락받지 못한 무언가를 몰래 주워담듯이 사진을 남겼다.
도시에 살면서 이러한 육체노동을 가까이서 보는 게 무척 오랜만이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거리를 두는 나의 사고(思考)를 의식하며, 잠시 손발을 번갈아 쓰는 이들의 일을 가볍게 여기고 있는 건가 하는 혼란스러운 생각이 들었다가, 그저 잠시 시침과 분침이 멈춰버린 곳을 지나치고 있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일이 없는 날 너무 책에 파묻혀 있었던 건가 싶었다가, 그럼에도 현대사회에도 보이지 않는 계급은 분명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물론 요즘 사람들은 계급보다는 계층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급이 떨어진다는 말보다는 층이 낮다는 말이, 급이 다르다는 말보다는 층이 높다는 말이 덜 거슬리지 않겠는가.
계급의 고저를 떠나 내가 여기 일하는 노동자들과 같은 순간 같은 공간에서 서울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어떠한 교집합도 찾아낼 수 없으며, 짐짓 그들 집합을 아는 체 하는 것은 아무 실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주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0년 초반에 이곳을 왔을 때처럼 투명 프리즘을 통해 호기심만으로 이곳의 사회적 맥락을 읽어내기에는 벌써 서른을 맞이해 아무 새로울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나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도 아닌데 이런 비생산적인 상념에 빠져 있었다.
창작촌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펍, 바, 레스토랑, 카페가 다른 분위기의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었지만, 아직 이른 낮인지 문을 열지 않은 곳이 많았고 무엇보다 아직까지 발길을 사로잡는 갤러리나 공방은 눈에 띄지 않았는데, 미련을 남겨두는 대신 문래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은 잠시 실수를 저질렀다는 듯 쪽빛으로 바뀌어 있었고, 당산에서 합정으로 넘어가는 철교 위에서 바라본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소년 같을 얼굴을 하고 나를 응시한다. 홍대입구역에 내려 생각보다 비싼 값에 출력물을 뽑고, 다시 간 곳은 동교동의 어느 카페.
그냥 집에 가서 뒹굴대며 책을 읽어도 되는 일이건만, 무슨 노파심에서인지 어떤 공간 안으로 나를 욱여넣고야 만다. 쫓기는 사람처럼 다시 책을 펼쳐 활자에 시선을 고정한다. 마치 오랜 도보여행 끝에 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수분의 공급보다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물의 감각이 다급한 사람처럼 줄글—주제 사라마구의 글은 문장과 문단의 호흡이 어찌나 긴지..—을 잘근잘근 씹어먹는다. 좀처럼 정돈되지 않는 하루의 반나절은 메뚜기처럼 카페와 골목을 전전하다 이와 같이 시간 속으로 분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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