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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s la rue : 사진일기 from Dec. '19주제 없는 글/印 2020. 2. 9. 02:30
원효대교를 지나 원효로를 따라 용산 상가를 가로질러 가는 길. 중학교 때 가끔 왔던 이곳은 지금은 오프라인 상거래 면에서 보자면 완전히 쇠락해 버렸다. 내가 사는 동네를 빼곤 서울은 하루가 다르게 모양을 달리 하는지라, 이곳 용산도 가히 상전벽해라 할 만큼 신수가 훤해졌지만, 주변의 건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으리으리한 건물들은 2020년대의 풍경이 반세기 이전과 딱히 어울릴 생각이 없음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 같다. 한 번은 미술을 공부하던 소개팅 상대가, 갤러리가 어느 동네에 몰려 있느냐에 따라 이른바 집값이 유망한 동네를 알 수 있다고 했었는데 용산이 바로 그렇다며 가벼운 농담조로 이야기를 했었다. 강남에 있던 갤러리들이 용산으로 속속 둥지를 틀고 있다며. 정말 가닥 없이 잡스런 생각이다. 실시간으로 중계되던 용산 철거현장 화재의 일도 빼놓을 수 없을 텐데, 용산역에서 남영역, 서울역으로 이르는 길에는 아직도 그와 비슷한 건물이 빼곡하다. 이 도시에는 아직도 내가 알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너무 많다.
퇴근 후 아버지에게 선물할 기타악보를 출력하려고 헤맸던 길. 아주 어렵사리 옛 여의도 백화점의 제본소에서 출력을 했는데 B4 용지 한 장에 500원을 받았던가. 주된 고객이 누군지는 몰라도 B4 용지도 없어서 B3 용지를 절반으로 자른 뒤 출력을 했는데, 그마저도 나중에 확인해 보니 양면 인쇄를 엉터리로 해놨다.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간판 대신 손바닥만한 현수막으로 가게 이름을 적어놔서 찾기도 힘들었는데, 가게에 도착하기 전 같은 층을 몇 번이나 뱅뱅 돌다가, 제본소를 코앞에 두고 옆가게 아주머니에게 혹시 이 제본소 위치를 아냐고 물었더니, 샐쭉한 표정으로, 바로 앞에 있잖아요, 왜들(부부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저렇게 해놓는지 몰라, 하고 알려주는데, 같은 층을 쓰는 상인들끼리도 유별나게 여기는 가게인 모양이다.
나는 이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황혼녁. 어스름 속에 있다보면 어떤 경계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해뜰녁과 해질녁이 딱 경계에 놓인 순간인데, 완벽히 올빼미족인 나에게는 물론 해뜰녁의 어스름을 느긋하게 감상할 겨를은 없다는 사실.
어떤 경로로 남긴 사진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햇빛이 너무 강하지 않아서 남긴 사진인 건가.. 경희궁 근처에서.
내가 좋아하는 길 중 하나. 다동과 무교동을 끼고 있는 길목. 독일어를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과 먹었던 파니니. 지금은 결혼한 대학동기와 함께 갔던 인도음식점. 나를 각별히 챙겨주던 하지만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선배와 함께 갔던 등갈비집. 프랑스어 레슨을 받기 위해 종종 들렀던 카페. 모두 이 사진 속 장소로부터 반경 50미터 안에 있을 것이다. 기록을 남긴답시고 점점 더 회고적으로 글이 흘러가는데, 하여간 사교라는 것이 대개 식당, 카페, 레스토랑에서 자연스레 이뤄지는 건가 싶다. 다 좋은 사람들과의 기억이라 다행스럽다.
작년 크리스마스 지나서였는지, 신촌에 크리스마스 트리 색상으로 조명을 밝혀 놨다. 이 때가 아마 새벽 1시 가까이 퇴근하고 마지막 버스을 타고 오던 때라서, 신촌 거리가 이렇게 한산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썰렁했다. 요 근래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일이 몰리다보니 지켜보던 동생이 그렇게 야근하는 회사가 요즘 세상에 어디 있냐며 일 관두라 하지만,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몸은 힘들어도 마음까지 힘들다 생각하진 않았다. 그냥 그런 동생의 말만으로도 고마울 뿐이었다.
하나둘 불길을 밝히기 시작하는 어느 골목 풍경.
영어 시험 보려고 이른 아침부터 시청역 행. 사실 공부를 한지도 좀 되었고 시험을 등록해 놓은지도 좀 오래되었는데, 등록해 놓은 시험일 바로 전날 회사에 일이 터져서 밤샘 작업을 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비싼 수수료를 물고 3주일이였던가 시험을 미뤘는데, 미뤄서 시간을 벌었다고 해도 이렇게 일에 치여서야 무슨 시험을 보겠나. 컴퓨터로 보는 시험이라 시험이 종료되면 시험 결과가 바로 나오는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보다도 점수가 너무 낮아서 여러모로 멘붕이었다.
또 다른 황혼녁 풍경.
피맛골은 대칭 형태의 현대식 건물이 줄줄이 들어서면서부터 옛 자취를 완전히 감추었지만, 을지로 일대에는 아직도 노옥(老屋)과 노포(老鋪)들이 많이 남아 있다. 젊은 아티스트들과 독특한 테마들로 탈바꿈한 인근 익선동과 달리, 명동에서 빗겨난 이곳 을지로 일대는 세운상가를 리노베이션한 뒤에도 그다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들이지는 못하는 모양새다. 하루는 한겨울에 냉면을 먹으러 평양식 냉면가게에 들어갔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도 있고, 단체로 온 사람들도 있다. 요새는 개성 있고 공들여 단장한 가게들이 참 많은데, 세월의 때가 켜켜이 침전(沈澱)된 이런 노포들은 마치 육중한 시간의 무게를 인테리어 소품으로 삼고 있는 것만 같다.
해저물녁의 광화문. 임전(臨戰)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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