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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멀리 높은 어딘가에서 비가 휘몰아치는지 하늘이 수심(愁心)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 다행히도 그 비를 보도(步道) 위까지 뿌리지는 않는지라, 걸으면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비 냄새가 밴 농밀한 공기의 살랑임까지다. 그 바람 안에는 여러 방울의 장맛비가 섞여 있고, 울창한 가로수의 녹음(綠陰)이 발산하는 싱그러운 내음이 섞여 있다. 뒤이어 보도블럭 아래 고르게 다져진 모래에서 올라오는 도시의 탁한 흙냄새가 따라온다. 누군가 이런 날씨를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날씨라며 좋아하던 생각이 난다.
높거나 낮거나 빌딩들은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벽돌건물도 콘크리트건물도 차분하게 기다리는 듯하다. 이들이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누구를 기다리는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뿔뿔이 흩어질 굳은 결심과 처음부터 헤어짐을 예견하는 만남. 서소문에서 정동길을 따라 경희궁으로 향하는 길에는 그런 우중충한 분위기가 짙게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적막하고 단정(端整)한 맵시가 있다.
마음은 텅텅 비었으면서도 가볍지가 않다. 발걸음 역시 홀가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답답한 것도 아니다. 내게 어떤 답을 구하는 건 아닐까 짧은 순간 무언가 응시(凝視)한다. 빨간 벽돌, 교회당의 첨탑, 아담한 회양목, 군청색깔 유리빌딩, 하늘을 포개어 놓은 듯한 아스팔트, 와인색 이끼가 낀 덕수궁의 석조전, 행선지를 알 수 없는 서로 다른 표정의 사람들. 그런데 나에게는 더 이상 내어줄 마음도 답변도 남아 있지 않다.
고종(高宗)의 파천(播遷)을 견뎌냈던 정동길은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즈넉하게 나를 받아들인다. 길은 그리 널따랗지 않다. 행인은 적고 조용하다. 길의 기능은 ‘이어주는 것’이지 ‘가두는 것’이 아니기에, 이 정동길은 머릿속으로 그리던 목적지까지 나를 바래다 주지만, 머릿속으로 그렸던 것이 비단 목적지만은 아니었나 보다. 목적지에 이르렀으나 다다른 느낌이 빠져있다.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물음표가 팽팽하게 시위를 당겨 어느새 또 다른 가공(架空)의 과녁(的)을 겨눈다. ―서소문(西小門)으로부터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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