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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
밀물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야자수가 자라나고 있는 고대(高臺) 언저리의 희고 휘청거리는 모래와 바닷물 사이로는 굳건한 모래사장이라고는 겨우 한 가닥이 좁다랗게 나 있을 뿐이었다. 랠프는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한 가닥의 굳건한 모래사장을 골라잡고 걸어갔다. 발길을 지켜보지 않고서도 걸어갈 수 있는 곳은 거기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가를 걸어가다가 홀연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그는 놀랐다. 이승의 따분함을 깨우친 것 같았다. 이승에서의 모든 도정은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며, 세상살이의 태반은 발걸음을 조심하는 데 보내지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그 외가닥의 모래사장을 바라보았다. 흡사 즐거웠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듯 열을 올렸던 최초의 탐험을 생각해 내고 그는 비웃듯이 미소를 지었다.
책을 구매하기에 앞서 약간 앞부분을 읽어보았을 때에는, 마치 소년들의 모험담 같아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나 <톰 소여의 모험>과 같은 이야기 전개를 예상했었다. 그런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 오히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비슷한 느낌의 이야기였다. 여러가지 은유가 가득해서,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또는 사물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머릿속에 그려보아야 했다. 그만큼 읽기도 까다로웠고 더 어렵게 느껴졌다.
<동물농장>이 동물들을 등장인물로 내세워서 인간을 풍자한다면, <파리대왕>에서는 등장인물 모두가 '소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를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했다. 첫째, 미성숙한 소년들을 소설 속 무대에 올리고 이들의 갈등과 알력 다툼을 조명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비합리성을 폭로한다는 점이다. 이는 우둔한 동물(때로는 아주 영악한 동물)들을 등장시켜 인간사회의 모순을 풍자한 <동물농장>과 비슷한 효과를 가져다준다. 둘째, 우리 사회가 생래적으로 불완전성, 비이성, 그리고 계산되지 않는 우연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격체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 제도를 만들고 다양한 사회 시스템을 고안했다. 그러나 이 어린 소년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러니까 이러한 제도와 시스템에 아직 때묻지 않은 이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은, 보이지 않는 공포에 취약하고 그러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인간을 짓밟는 행위를 서슴지 않음을 보여준다. 과연 훌륭한 교육 제도와 사회 시스템이 동원된다 한들, 이러한 인간의 비합리성을 완벽히 제거하고 올바른 어른으로 키워낼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만한 교육 제도와 사회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나 한가?
소년들의 이야기만 읽어서는 인간은 위험한 존재이고 제도는 무능한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마지막 장면에서 밑도 끝도 없는 전투를 일단락지어주는 '어른 장교'의 등장은, 인간사회의 갈등을 봉합해줄 수 있는 어떠한 해결의 실마리 또한 우리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음을 작가가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결론적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작가의 평가는 해피엔딩이지 않을까.
다만 또 한 가지 걸리는 점은 <파리대왕>이라는 소설의 제목이다. 흔히 하찮고 귀찮은 것으로 간주되는 벌레, 썩은 유기체를 윙윙대며 맴도는 기분 나쁜 이 존재는 크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소설 속에서 몇 차례에 걸쳐 등장한다. 바로 비이성과 광기, 충동이 초래한 살생의 장면마다 등장하는데, 파리'대왕'이라 하는 것을 <동물농장>에서 독재자로 군림하는 '나폴레옹'과 동일선상에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나폴레옹'이 속한 세계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치밀하게 조종되는 곳이라면, 소년들이 불시착한 무인도라는 세계는 비이성과 광기가 지배하는 곳이다. 이데올로기든 무엇이든 간에 인간의 사유체계 자체가 마비된 공간이다.
때문에 파리'대왕'이라고는 해도 절대적인 지도자라 할 만한 인물은 사실상 없다. 초창기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발된 '랠프', 강력한 카리스마와 포퓰리즘을 통해 주도권을 얻은 '잭' 가운데 어느 쪽을 무인도의 '대왕'이라 일컬어야 할지 애매하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집단광기를 등에 업은 잭이 득세하고 랠프는 수세에 내몰린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고작해야 광기와 비이성의 현장마다 따라다니는 '파리'들이 드글대는 무인도에서 자칭 '대왕 노릇'을 누가 할지를 두고 엎치락뒤치락 씨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나 저러나 어려운 소설이었지만 그만큼 여러모로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들의 유치한 싸움에도 마침내 끝이 있었던 것처럼, 인간의 비이성과 광기를 잠재울 수 있는 무언가가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비록 소설 속에 그 해답까지 나와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