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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레프 톨스토이>
"인간 속에 잠재해 있는 야수성은 좋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날 때 인간은 높은 정신적 차원으로 이를 멀리함으로써 올바른 자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겉껍질뿐인 미와 시적인 감정으로 둘러싸인 야수성이 타인의 존경을 바라게 될 때 인간은 야수성 속에 빠져 선과 악을 명백히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을 꼽으라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언급하곤 한다. 그렇지만 정작 톨스토이의 작품은 <안나 카레니나> 외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어본 게 전부다. 그마저도 아주 어릴 적 읽은 것이다. 최근에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바—읽을 거리를 굳이 먼 데서 찾지 말자—가 있어서, 좋아하는 작가가 쓴 작품 중 읽어보지 않은 작품을 찾다가 <부활>을 읽게 되었다.
제목에서부터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데, 헨릭 시엔키에비치의 <쿠오 바디스>처럼 그야말로 성경의 내러티브를 통째로 모티브로 삼고 있는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고국 러시아의 그리스 정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부활>이 근본적으로 건드리는 주제의식은 인간 세계를 지배하는 '선악'이라 할 수 있고, 다만 주인공인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가 '원죄'를 저지르는 시점이 공교롭게도 '부활절'이라는 점에서 "부활"이라는 단어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톨스토이는 아마도 '원죄'와 '부활'의 시점을 의도적으로 중첩시켜서, 네흘류도프가 갱생하는 과정을 더욱 극적으로 나타내고자 했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랬듯, 작가는 <부활>에서도 계급차이에서 기인하는 부당한 처우에 대한 비판의식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더불어서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대두되고 있던 토지 소유에 대한 문제의식도 나타낸다. 여기에서 나쓰메 소세키와 다른 점이 드러나는데, 톨스토이는 창작활동을 통해 보다 분명한 자기 목소리로 사회적인 의견을 개진한다. 물론 개인 내면에 잠재된 성향이나 행동의 묘사도 흠칫하고 놀랄 만큼 훌륭하다. 나쓰메 소세키의 글은 안으로 안으로 끝없이 침잠해 들어가는 느낌이라면, 톨스토이의 글은 생각을 적극적으로 시원하게 표출하는 느낌이다.
일반적으로 러시아 소설은 등장인물의 이름이 너무 어렵다는 인식이 있는데,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도 애칭으로 간략하게 부르면(<안나 카레니나>에서 '카제리나'를 '카챠'로 줄여 부르듯) 그나마 수월하다. 오히려 등장인물의 이름이 어려웠던 소설은 남미 소설 중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었던 것 같다. 몇 세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의 이야기인데 이 이름이나 저 이름이나 다 같은 이름 같아서 초반에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에 비해 <부활>은 주인공의 이름이 네흘류도프, 마슬로바 등 비교적 어렵지는 않지만, 대신 주변 인물들의 이름을 종종 깜박하곤 했다;;
근대의 러시아는 프랑스를 문화선진국으로 설정하고 프랑스를 모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를 모방하여 '상트 페테르부르그'라는 거대한 계획도시를 세웠을 만큼. 그래서인지 소설에도 상류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대화에서 프랑스어로 된 대사가 나오곤 한다. 몇 년 전 굳은 머리를 풀 겸 <롤리타>라는 러시아 소설을 영어로 읽어보려는 무모한 도전을 했었는데, 영어 어휘도 어려웠지만 곳곳에 매복한 프랑스어 문장 때문에 읽기를 포기했던 기억이 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 문학은 그들이 닮고자 했던 프랑스의 그것과는 정말 느낌이 다르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로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도 그렇듯, '인간의 선악'이라는 주제가 매우 뚜렷한 명암을 갖고 다뤄지고, 글은 조금 투박해도 힘이 있다. 그에 비해 프랑스 소설은 개인의 실존적 고민에 천착하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 대표적으로 알베르 카뮈의 작품들처럼.
그나저나 올해는 책을 많이 읽겠다고 다짐을 하긴 했지만, 소설을 많이 읽겠다는 건 아니었는데 너무 문학만 파고 있는 것 같다. 그마저 여유도 없는데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 하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