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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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대일상/book 2020. 9. 27. 23:53
w/Dugo Sodo 이런 책을 읽을 때는 잠시 삶의 경계에 머물렀다 나온 느낌이 든다. 우리가 흔히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피카소나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은 모두가 천재라고 하니 천재인가보다 하지만, 내가 그 천재성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큐비즘은 분명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지만 나의 취향은 아니고, 오히려 큐비즘 이전 피카소의 작품을 좋아한다.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개념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언뜻 심오하다고 느끼지만, 일상에서는 뉴턴의 고전물리학만으로도 충분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문학에서는 작가의 천재성을 곧바로 느낄 때가 많다. 어떤 작가들은 내 삶의 일부분을 부지불식간에 짚어낸다. 줌파 라히리의 작품이 그렇다. 이런 작가들은 삶의 ‘이면(裏面)’을 어디까지 들어가 보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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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멸(Il disperezzo)일상/book 2020. 9. 13. 23:35
『영화란 무엇인가』를 읽는 동안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읽은 『경멸』이라는 책은 누벨바그의 거장인 장 뤽 고다르에 의해 영화화된 글이기도 하다. 이 책을 덮고 나서 떠오른 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경멸’이라는 테마로 인간 심리를 입체적으로 파헤친 이 글은 사랑하는 여자를 그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동시에 고전 『오디세이』에 대한 다채로운 분석이기도 하다. 어느날 남편 리카르도를 경멸하게 된 아내 에밀리아와 그런 에밀리아의 마음을 되돌려보려는 리카르도의 이야기가 『경멸』의 뼈대를 이룬다. 그리고 여기에 세속적 인물인 영화제작자 바티스타와 우울한 독일인 감독 레인골드가 합류하면서 『오디세이』 속 율리시스라는 인물이 여러 각도에서 조명된다. 분명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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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일상/book 2020. 9. 7. 23:33
두 권의 책 사이에서 손끝이 허공을 맴돌았다. 『절망』과 『창백한 불꽃』. 모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책이다. 『롤리타』를 읽은 뒤로 사놓은 책들인데, 처음에는 『절망』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결국 『창백한 불꽃』을 집어들었다. 『절망』은 정말 절망스러울 때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 그런 절망은 찾아오지 않았다. 또는 그런 절망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창백한 불꽃』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독서를 요구했던 책이다. 머리말에서부터 킨보트라는 인물이 편집과 출판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아서 갸우뚱하기도 했고, 나보코프의 장난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은 크게 두 개의 구성으로 나뉜다. 하나는 킨보트의 절친한 벗인 셰이드가 쓴 총 네 편 1000행 짜리 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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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의 글을 읽고일상/book 2020. 9. 5. 17:52
자크 데리다의 글을 읽고 느낀 점을 남기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길고 어려운 글이었기 때문에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차일피일 글쓰는 것을 미뤄왔다. 이전에 미셸 푸코와 들뢰즈, 과타리의 글도 일부 읽어봤지만, 프랑스 철학은 참 난해하다. 바로 그 난해하다는 매력(?) 때문에 계속 글을 찾아서 읽는데, 『그라마톨로지』는 그에 비하면 난해한 편도 아닌 것 같다. 프랑스어로 된 원본이더라도 읽기 까다로웠을 것 같은 글이다. 역자도 이전에 한 번 번역했던 것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며 정리정돈을 했다고 하는데 어마어마한 작업이었을 것 같다. 이 책에는 매우 다양한 인물과 철학이 소개된다. 소쉬르, 프로이트, 레비스트로스, 하이데거, 후설, 헤겔, 루소까지. 이밖에도 생소한 언어학자들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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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세대일상/book 2020. 8. 28. 00:18
Generation “п” (P세대)피즈뎃(пиздеть) : 시덥잖은 말을 지껄이다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 : 1985년 고르바초프 취임 이후 추진된 개혁개방정책펩시콜라(пепси-кола) : 코카콜라와 더불어 자유시장경제와 자본주의의 심벌 매우 괴짜 같은 문체, 난해한 어휘들. 이 책을 읽은 뒤 빅토르 펠레빈이 오늘날 러시아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작가라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느낌이 약간 가미된 것 같기도 하고, 도스토옙스키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이 소설은 소련붕괴 이후 러시아 시민들이 직면했던 인지부조화(?)를 다루고 있다. 특히 세계에서 처음으로 인공위성(스푸트니크)을 쏘아올렸던 소련의 기세등등한 옛 영광을 기억하고 있는 구세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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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마톨로지(Grammatologie)일상/book 2020. 8. 23. 00:25
이 제목 아래 어떤 생각을 품든 간에, 언어의 문제는 결코 여러 문제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만큼 그 문제가 있는 그대로 가장 다양한 연구들과 그 의도, 방법, 이데올로기에 있어서 가장 이질적인 담론들의 세계적 지평을 침입한 적은 없었다. ‘언어’라는 낱말의 평가 절하 그 자체, 그 낱말에 부여하는 신용에서 그 어휘의 졸렬함, 헐값에 농락하려는 유혹, 유행에 수동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것, 전위의식(conscience d’avant-garde), 즉 무지, 이 점들 모두가 그 점을 증언한다. ‘언어’라는 기호의 인플레이션은 기호 자체의 인플레이션이며 절대적 인플레이션이자 인플레이션 그 자체이기도 하다. ―p. 41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 그 역설은 다음과 같다. 자연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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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에렉투스의 유전자 여행일상/book 2020. 8. 15. 23:30
우리는 유전자와 게놈의 개념을 뭉뚱그려 사용한다. 엄밀하게 말해 게놈을 유전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게놈은 33억 개의 염기쌍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극히 일부를 유전자라고 한다. 게놈 중 약 2퍼센트가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데 관여한다. 쉽게 말해 유전자는 우리 인체의 구성요소인 약 30조 개 세포의 계획도인 셈이다. 놀랍게도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유전자의 수는 약 1만 9,000개밖에 안 된다. 반면 단세포 미생물인 아메바는 약 3만 개의 유전자를, 유럽소나무는 5만 개가 넘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 그런데 생물의 복잡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유전자의 개수가 아니다. 세포핵이 있는 생물인 경우 한 개의 유전자가 다양한 구성요소로 조합될 수 있다. 이 유전자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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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 가벼운 여행(Resa med lätt bagage)일상/book 2020. 8. 3. 00:09
배가 드디어 잔교를 빠져나갈 때 나의 마음에 밀려오는 안도감을 묘사할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그때다. 아니 불러도 소용없을 만큼 배가 부두에서 멀리 떨어진 다음에…… 아무도 내 주소를 물어볼 수도, 무슨 끔직한 일이 벌어졌다고 소리를 칠 수도 없을 때……. 사실 여러분은 내가 느끼는 어지러울 정도의 해방감을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외투의 단추를 풀고 담배 파이프를 꺼냈지만, 손이 떨려서 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어쨌건 나는 파이프를 잇새에 물었다. 파이프는 주변 환경과 나 사이에 나름의 거리를 만들어 준다. 나는 이물 앞으로 나아갔고, 도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둘도 없이 최고로 마음 편한 관광객처럼 난간에 기대어 섰다. 맑은 하늘의 작은 구름들은 장난스럽고 기분 좋게 무질서해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