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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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일상/book 2020. 5. 24. 15:29
늘 조각글로만 접해왔던 를 완본으로 읽었다.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여러모로 제약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다. 그 동안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스치듯 봐왔던 것을 제대로 살펴보는 시간으로 삼자. 틈틈이 독서를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잘 살펴보면 처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고전(古典)이 많다. 이밖에 , , 같은 고전들도 읽어보고 싶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에 취미를 붙인 게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라, 고전으로 불리는 영화들 중 안 본 것이 많다. , , 처럼 여러 히치콕의 영화가 그러하다. 여행도 똑같다. 해외의 이곳저곳을 욕심내어 다녀보았지만, 정작 국내 여행은 그만큼 다니지 않았다. 최근에는 청송의 주왕산을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교통이 너무 불편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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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희곡선일상/book 2020. 5. 16. 22:33
체호프의 희곡은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오래전 시공사에서 나온 것을 한 번 읽었었다. (정확히는 중간에 읽다 말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다 근래에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희곡선을 다시 읽어보았다. 4월 초에 보려고 예매해두었던 연극 한 편이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모든 공연이 취소되면서, 아쉬움을 달랠 겸 체호프의 희곡들을 읽었다. 머릿속으로 무대의 모습과 조명, 인물들의 동작과 대사의 강약을 그려가면서. 나는 러시아 문학을 좋아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문학세계를 구가할 수 있었던 남성작가로서의 톨스토이를 은연중에 비판하지만, 러시아 문학은 분명 투박하면서도 굵직하고 명료한 매력이 있다. 서구 열강에 비해 낙후된 사회문화(가령 지주와 농노의 대비)와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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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일상/book 2020. 5. 3. 21:16
우리는 사랑해야만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 짧다. 아이의 시선에서 순수한 형태의 사랑을 읽을 수 있었던 글,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아이의 눈동자에서 세상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던 글이었다. 삶을 비관하고 자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 것은 모모(모하메드)와 같은 꼬마에게만 가능한 것일까. 이미 세상에 너무 많은 감정―그것이 애정이든 불편함이든 무심함이든―을 안고 있는 나 같은 어른은 모모가 경탄스럽기까지 하다. 모든 것은 담백해야 하고 간결해야 한다. 삶을 얻는 것은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어떻게 살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삶 자체가 부정(否定)당할 뻔했던 소년이 삶이라는 만화경을 향해 가슴 펴고 마주하는 모습, 그 천진하고 개구진 모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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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일상/book 2020. 5. 1. 21:50
버지니아 울프의 을 읽은 뒤 이 책을 집어든 것을 순전히 우연의 일치라 해야할지…… 집을 나서며 가장 얇은 책을 고른다는 것이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 이전에 읽다 만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을 떠올리게 하는 책 제목 때문에, ‘사건의 반전(反轉)’이나 ‘인식의 환기(喚起)’가 압축적으로 담긴 글을 잠시 기대했던 것 같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이 책만큼 어떠한 인식을 환기시키는 글도 없지만. 임신 중절을 시도하는 어느 대학생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글과 매끄럽게 이어진다. 글에는 뱃속 아이의 아빠에 대한 부분이 사실상 도외시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화자의 행위와 감정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차우셰스쿠 독재통치 하 불법적으로 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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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일상/book 2020. 4. 30. 21:58
이븐 할둔의 두꺼운 아랍 역사서를 읽는 틈틈이 쏜살문고에서 나온 책을 읽고 있다. 책이 가볍고 얇아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앞서 를 재미있게 읽어서, 여러 권의 문고본을 주문해 두었었는데, 은 그 가운데 처음으로 읽은 책이다. 낚시를 통해 사유(思惟)를 건져 올린다는 도입부의 문장이 낯익은 걸 보면, 책을 읽기 전에 다른 글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접한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서문을 읽으면서 이 책이 페미니즘의 입문서 또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바이블쯤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냈다. 사실 처음 책을 집어들 때에는 이라는 제목에서 자전적인 이야기를 기대했었는데, 이 책은 그런 성격의 이야기와 거리가 멀다. 자기만의 방과 연간 오백 파운드의 수입. 여성이 자신의 생각을 훼손당하지 않은 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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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매일상/book 2020. 4. 25. 23:00
자유가 필요악이라면, 그리고 그 자유를 매순간 낭비하고 있다면, 차라리 이 모든 것이 착각이라면. 근사한 책표지만큼이나 모든 문장을 통째로 머릿속에 새기고 싶은 책. ……그것이 동물과 인간의 차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루시는 상황에 따라 극도로 맹렬하게 변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미동조차 않은 채 예의 바르고 한가롭게 앉아 있었다. 인간은 지나치게 연극적인 존재라 열정도 준비하고 연습해야 한다. 그렇기에 인간 생의 절반은 모호하고 격렬한 가장(假裝)이다.―p. 27~28 하지만 루시의 가장 눈에 띄는 아름다움은 표정이었다. 작은 불꽃같아서 관심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깜빡거리지 않았고 환하거나 따뜻함도 없었다. 욕구나 소명에 인생의 모든 순간을 집중하는 기운 넘치는 남자들에게서 가끔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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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일상/book 2020. 4. 13. 17:52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 영화 에 은희가 교습소의 선생님에게 건넸던 책이다.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선과 악을 대립시키는 헤르만 헤세의 서술방식이 조금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헤르만 헤세는 단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읽어보았던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손으로 꼽아보다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작품이 떠올랐다. 「데미안」, 「싯다르타」, 「수레바퀴 아래서」 모두 좋은 책들이지만, 헤르만 헤세의 세계관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작품이 아닌가 아닌가 싶다. 이 책을 학교 다닐 때 도서관에서 읽었더랬다. 헤르만 헤세의 서적이 꽂힌 구역에서 뜬금없이 집었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인물이 명징하게 반대항을 이루며 음과 양처럼 서로를 휘감고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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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원소 이야기일상/book 2020. 4. 12. 03:22
18세기 말 화학을 혁신했던 라부아지에의 업적 중 하나는 홑원소물질로서의 원소, 즉 분리된 형태의 원소에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이었다. 이것은 화학이 짊어졌던 과도한 형이상학적 짐을 덜어냄으로써 화학을 발전시키려는 의도였고 실제 위대한 진전이었다. 라부아지에에 따르면 원소란 어떤 화합물의 구성 성분을 낱낱이 분리했을 때 맨 마지막에 남는 물질이었다. 라부아지에가 정말로 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원소 개념을 없애려고 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실제로 분리할 수 있는 원소보다 추상적 의미의 원소가 덜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추상적 의미의 원소 개념이 완전히 잊힌 것은 아니었으니, 그 개념의 지위를 격상시키자고 제안했던 화학자 중 하나가 바로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