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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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5일상/book 2022. 2. 28. 06:31
객줏집을 나선 길상은 아무도 없는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접어든다. 역시 강아지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길, 사람도 시가도 모두 피곤한 잠에 빠져 있는 것이다. 불타버린 폐허 옆을 지나간다. 군데군데 쳐놓은 이재민의 막들이 보채다 잠이 든 아기같이 적막 속에 엎드려 있다. 구릉진 곳을 휘청휘청 올라간다. 자작나무 몇 그루를 지나서 바위 옆에까지 간 길상은 바위에 등을 기대고 가물거리는 별들을 오랫동안 올려다본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별들은 저렇게 가물거리고 있었더란 말인가. 시가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방금 지나온 그 자리가 희미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무너지고 재가 되고 폐허로 변한 곳, 저 잿더미는 죽음일까? 저 사물의 변화는 과연 죽음일까? 끝이 없는 세월과 가이 없는 하늘은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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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부—하동(河東) 이야기를 읽고일상/book 2022. 2. 26. 07:34
『토지』 1~4권은 하동 평사리에서 전개되는 구한말 양반과 평민들의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크게 첫 번째 부(部)를 이루게 된다. 박경리 작가는 1926년 출생으로 일제강점기이기는 하지만 경술국치로부터는 꽤 지난 시점에 유년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말기 또는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는 동안 하동 평사리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매우 현장감 있게 전개되어서 19세기 초 사회상을 어떻게 속속들이 아는지 궁금증이 든다. 윤씨 부인이 괴정으로 목숨을 잃는다든가, 서희가 간도로 넘어간다든가 하는 대목이 지나치게 생략되는 감은 없잖아 있지만, 그럼에도 손에서 『토지』를 놓을 수 없는 건, 바로 그러한 생생함 때문이다. 이야기가 주는 현장감은 토속적이고 적나라한 평민들의 사투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한말 조선을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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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4일상/book 2022. 2. 24. 19:06
개명(開明)에의 물결은 시시로 일고 있었으나, 그것이 일개 정권욕을 위한 이용물이든 외래 문물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이든 혹은 진실한 우국충정의 개혁운동이든 하여튼 개명의 물결은 오백 년 왕실을 주축으로 하여 썰물 밀물같이 밀려왔다가 밀려가곤 했는데 물론 역사의 필연의 과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 혹은 신의 의지는 공명정대의 역학(力學)을 기간(基幹)으로 하되 잔가지 잔뿌리는 역사의, 신의 의지 밖에서 우연과 변칙이 시간 공간 속을 소요(逍遙)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고 다만 필경에는 우여곡절하여 그 기간으로 귀납될 것을 신이나 역사 그리고 예지의 사람들이 알고 있으며 믿고 있을 뿐이다. 지금 동방의 작은 등불 같은 조선의 백성들은 동트는 하늘을 바라보기 위해 새벽잠을 깨고 자리에서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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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3일상/book 2022. 2. 6. 06:58
‘짐승이나 사램이나 버려지라 카더라도 이 세상에 한분 태어났이믄 다 같이 살다 죽어얄 긴데 사램은 짐승을 부리묵고 또 잡아묵고, 호랭이는 어진 노루 사슴을 잡아묵고 날짐승은 또 버러지를 잡아묵고 우째 모두 목심이 목심을 직이가믄서 사는 것일까? 사램이 벵드는 것도 그렇지마는 짐승들은 와 벵이 드까. 사람은 약도 지어묵고 침도 맞고 무당이 와서 굿도 하지마는 말 못하고 쫓기만 댕기는 짐승들은 누가 그래 주꼬. 늘 혼자 사는데, 벵이 들믄 짐승들은 산속이나 굴속에서 혼자 죽겄지. 혼자 울믄서 죽겄지. 아아 불쌍한 짐승들아! 사람같이 나쁜 거는 없다.’ —p. 95~96 사철이 음산한 바람과 빛깔에 덮여 있는 것 같았고 두텁고 무거운 외투자락과 털모자와 썰매의 북국(北國)에서 이동진은 그네들의 문물제도를 착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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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2일상/book 2022. 1. 30. 06:15
“요새는 와 그런지 그 생각이 문뜩문뜩 나누마요. 그때 나는 고라니 한 마리를 잡았는데 말입니다. 그기이 암놈이었소. 거참, 희한한 일이었소. 다음 날 고라니를 잡은 자리를 지나갔다 말입니다. 그랬는데 암놈 피가 흐른 자리에 수놈 한 마리가 나자빠져서 죽어 있더란 말입니다. 총 맞은 자리도 없고 멀쩡한 놈인데……. 그, 그기이 다, 허 참 그기이 다 음양의 이치 아니겄소?” —p. 39 그는 백성을 우중(愚衆)으로 보았었고 배우기를 잘못한 권력자들이 배부른 돼지라면 우매한 백성들은 배고픈 이리라 하였다. 체모 잃은 욕심, 권력을 휘두르며 권태로운 삶을 즐기려는 수탈자에게 우중들은 쓰기 좋은 도구요, 우중이 만일 깨쳤다고 보면 무지스런 파괴의 독소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어느 계기가 와서 이 상호간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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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일상/book 2022. 1. 27. 05:20
“기즉부(饑則附)하며, 포즉양(飽則颺)하며, 욱즉추(燠則趨)하며, 한즉기(寒則棄)는 인정통환야(人情通患也)라 하나 땅이야 어디 그런가? 사시장철 변함없이 하늘의 뜻과 사람의 심덕을 기다리고 있네.”—p. 178 “몽매한 백성이란 저승이든 이승이든 그 대가가 확실해야 움직이는 무리들이고 제 이익과 관계가 없으면 관여치 않는 꾀가 있는 놈들이오. 말하자면 그들에겐 지조가 없단 말이오. 존엄이 없단 말이오. 존엄이나 지조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무리들은 아니란 말이오. ……상놈들한테 아첨하는 개 같은 양반 놈이나 자비를 베푸는 늑대 같은 양반 놈이나 그게 다 한 무리가 아니겠소? 그놈들은 또 제 목숨만 보전된다면 의관이고 족보고 다 싸질러서, 백정이라도 해먹을 놈들이지.” —p. 206 어느 해, 마을에는 가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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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오른손일상/book 2022. 1. 24. 01:47
지금 나와 비슷한 나이에 전쟁터의 최전선에서 싸우다 전사한 젊은 학도(學徒)가 이렇게 좋은 글을 남긴 걸 보면, 그의 천재성에 먼저 감탄하게 된다. 종교사회학이 내게 낯설다손 치더라도, '죽음'과 '오른손'이라는 소재를 사회와 연결지어 체계적으로 논리를 구축해나가는 그의 침착함과 담담함, 성실함이 정말 놀랍다. 1. 죽음 기존에 축적된 민속지적 연구를 볼 때, 에르츠가 내린 결론에 따르면 개인의 죽음은 단지 사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으며 사회적 차원의 의미를 띤다. 즉 집합으로서의 표상이 작용한다. 사회를 이루는 개인의 소멸은 영속(永續)이라는 사회의 존재 목적을 위배한다. 따라서 사회는 분리-주변화-재통합 과정을 통해 사회가 영속할 수 있는 의례를 규정한다. 첫째, 개인의 죽음이 발생하면 그 사체와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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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鬱憤; indignation)일상/book 2022. 1. 20. 18:38
최근 서가에서 시선을 사로잡은 신간이 필립 로스의 『울분(indignation)』이라는 작품이다. 이전에 그의 『에브리맨』이나 『죽어가는 짐승』을 읽을 때에도 그의 작품세계가 잘 이해되지 않았었는데, 『울분』에서는 공감하는 대목이 많아 그의 세계관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소설 속 주인공인 마커스와 나와 닮았다는 점이 큰 것 같다. 마커스는 자신의 삶을 바꿔보기 위해 집을 나와 먼 곳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뛰어난 두뇌와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와 바라던 인생의 노선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여기에는 자신과 맞지 않는 다른 사람 또는 상황을 경멸하는 그의 비타협적인 기질과, 한 여인에 대한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그의 순수함이 큰 역할을 한다. 소설에는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