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는 글
-
버리고 버리기(棄棄)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11. 24. 01:22
요즘은 딱히 기록으로 남길 만한 일상이랄 게 없다. 몇 달 전 본가의 내 방을 대대적으로 청소할 일이 있었다. 집이 오래되다보니 난방시설을 수리하기 위해 몇 가지 가구도 들어내야 했다. 방을 정리할 때 늘 골칫거리는 방에 진열된 많은 책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크고 작게 수시로 정리를 하는데도 정리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래되고 부피만 차지하는 가구들도 과감히 버리면서 책들도 본격적으로 솎아냈다. 별의 별 책들이 있다. 취업 대비로 사두었던 각종 수험서, 어학 수험서, 전집, 초등학교 교과서, 대학교에서 쓰던 두꺼운 사회과학 서적들. 나중에는 솎는 작업도 귀찮아서 제목만 대충 훑어보고 버릴 것을 분류했다. 좀 더 착실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알라딘에 중고품으로라도 내놓았겠지만, 여기에 ..
-
누하동으로부터주제 없는 글/印 2020. 11. 12. 00:57
지난 번 종묘 출사에 이어 이번에는 인왕산 출사다. 출사라는 말을 붙이기도 좀 그런 게, 꼭 장비를 여러 가지 갖추지 않더라도 적어도 부지런은 떨었어야 했는데 오후 느즈막이 되어서야 인왕산 자락길에 올랐다. 지난 여름 카메라를 사두고 무료수리 보증기간이 끝나기 전에 카메라에 이상은 없는지 한 번 확인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중고로 카메라를 구입했던 가게에 잠시 들르는 겸사 가볍게 출사에 나선 것도 있고.. 올해 가을에 꼭 단풍을 보겠다고 지역별 명산의 단풍 예보도 샅샅이 살폈었는데, 결국 개인적인 사유로 인해 단풍이 무르익은 시기에 구경을 나설 수가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야외활동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여하간 그러디보니 짬을 내어 지난번 종묘에 갔을 때에는 아무래도 단풍이 ..
-
늦가을, 종묘주제 없는 글/印 2020. 11. 1. 01:20
올해 단풍을 구경하기 위해 속리산에 가려고 했다. 보은 방면에서 속리산을 오르면 천년고찰인 법주사도 둘러볼 수 있다. 그래서 지역별로 단풍 시즌이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검색을 해보다가 결국은 가을철 산행 생각을 접었다. 서울에서 보은까지 직선거리상으로는 그리 멀지 않지만, 보은, 그 안에서도 속리산을가기 위해서는 편도로 적어도 세 시간 정도가 걸린다. 코로나 유행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는 단풍 구경을 가더라도 영 찝찝할 것 같았다. 가는 방법도 문제이고, 머무르는 것 역시 문제다. 안동을 다녀올 때까지만 해도 코로나가 잘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늦여름에는 남해 독일마을을 가볼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하루이틀 바쁘게 일상이 흘러가던 중 2차 파동까지 겹치면서 좀 더 지켜보자며 가을로 여행을 미루어 ..
-
Here, I stand for you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9. 30. 20:53
#1. 부모님과 동생을 동대문 시장 방면으로 보내고 나는 광화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종로5가와 을지로4가 사이의 오래된 가게에서 소고기를 사드리고 나오는 길이었다. 추석 직전이기도 했지만 원래 모임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는데, 몇 가지 의견이 안 맞아서 좀 어정쩡한 점심식사를 했다. 며칠간 이어진 두통을 누르며 걸음을 내딛었다. 한동안 청계로를 따라 걷는데 세운상가를 가로지른 이후부터 을지로 방면으로 고층 빌딩들이 한창 지어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동안 을지로 쪽에 높은 빌딩이 꽤 들어섰었는데, 계속해서 새 건물이 올라가는 모양이다. 활기가 사라져가는 도심을 새로이 개발하는 것은 반길 일이지만, 건물의 파사드를 빈틈없이 채운 진부한 유리창을 보며 어떤 것이 정말 활력을 줄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
하루 이틀 사흘주제 없는 글/印 2020. 9. 19. 21:09
# 별 볼 일 없는 사진들이지만 따로 시간을 내어 사진을 담았다보니 어쨌든 포스팅으로 묶어본다. 하루에 다 찍은 사진은 아니고 이틀에 걸쳐 쏘다니며 찍은 사진들이다. 그중 하루는 ‘제비다방’에 갔다. 아마 이 카페를 눈여겨 봐둔지는 몇 년이 된 것 같다. 밤이 되면 라이브 공연이 이루어지는 카페인데, 그런 카페의 특성상 낮에는 사람이 많지 않고 오는 사람들도 대체로 테이크아웃을 하는 단골인 것 같다. 카페 안의 스케줄을 보면 대체로 밴드 음악인데 꽤 스케줄이 가득하다. 내가 간 시간은 낮 시간대. 손님은 나말곤 아무도 없었다. 따듯한 카페라떼를 주문한 뒤 들고 온 책 『창백한 불꽃』을 읽었다. 뭐 이런 책이 다 있나 생각하다가 점점 재미있게 읽었다. 본문에다 각주까지 페이지를 뒤적이면서 봐야 하는데, 조..
-
장마 끝자락의 기록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8. 21. 00:05
# 8월 길고 긴 장마가 끝나기 전의 일이다. 잠깐 볼 일이 있어 고등학교에 갔다가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도 벌써 10년 넘게 흘렀는데 정말로 신기할 만큼 예전 모습 그대로셨고, 정작 나를 보고 이름을 못 떠올리시면서도 소녀처럼 엄청 반가워하셨다. 나를 보면서 예전 모습 그대로라고 하시는데 나는 아직 젊은 나이니까 달라져봐야 얼마나 달라졌겠나, 연세가 있는 선생님이야말로 그대로인 게 더 놀랍다는 생각. 졸업앨범을 열어보며 한 시간 가량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종종 연락도 드릴 겸 휴대전화 번호도 교환했다. 반갑다는 인삿말로 집에 돌아와 메시지를 남겼는데, 뒤이어 선생님에게 긴 메시지 하나가 왔다. 내가 기억하는 너는 아주 착하고 성실한 아이이고…… 착하고 성실한 게 미덕이..
-
삶의 안팎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7. 15. 00:30
우리가 좋은 삶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큼 좋은 죽음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눈다면 어떨까? 행복한 일상, 삶에서 우선순위를 세우는 방법, 자신을 챙기는 방법, 이기는 습관에 이르기까지 삶을 개선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여러 자기계발서를 통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좋은 삶(Eudaimonia)’이라는 것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부터 철학에서도 이미 오래된 화두였으니까.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다. 죽음을 다룬 철학자 또는 사회과학자로 떠오르는 건 내게는 쇼펜하우어와 뒤르켐 정도다. 내세에서의 구원을 약속하는 성경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가까운 현세에 관한 것들이다. 안락사 문제를 다룰 때도 허용된 살인행위냐 인간의 존엄성 문제냐가 첨예한 논점이 된다.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사람들의 ..
-
서소문 가는 길주제 없는 글/印 2020. 7. 8. 00:10
아주 멀리 높은 어딘가에서 비가 휘몰아치는지 하늘이 수심(愁心)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 다행히도 그 비를 보도(步道) 위까지 뿌리지는 않는지라, 걸으면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비 냄새가 밴 농밀한 공기의 살랑임까지다. 그 바람 안에는 여러 방울의 장맛비가 섞여 있고, 울창한 가로수의 녹음(綠陰)이 발산하는 싱그러운 내음이 섞여 있다. 뒤이어 보도블럭 아래 고르게 다져진 모래에서 올라오는 도시의 탁한 흙냄새가 따라온다. 누군가 이런 날씨를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날씨라며 좋아하던 생각이 난다. 높거나 낮거나 빌딩들은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벽돌건물도 콘크리트건물도 차분하게 기다리는 듯하다. 이들이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누구를 기다리는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뿔뿔이 흩어질 굳은 결심과 처음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