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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克己×克時×克位=?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4. 10. 12:02
#1. 점심식사를 마친 뒤였다. 아버지가 답답하다며 불쑥 자전거라도 타러 나가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은퇴 직후 찾아온 코로나 국면에 활동적인 성격의 아버지는 일종의 도전에 직면하셨다. 코로나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황학동의 벼룩시장을 찾는 걸 무척 좋아하셨다. 우리 가족도 아버지의 성화를 못 이겨 한 번씩은 따라 가봤기 때문에, 황학동 벼룩시장을 가리키는 별도의 애칭을 달아놓았을 정도다. 시장에 들어가보지는 못하겠지만―청계천 따라서 가보시죠, 초콜렛 두 조각에 인스턴트 커피를 듬뿍 담아 가방을 꾸렸다. 얼마만에 타는 자전거인지 모른다. 이스라엘의 지중해 연안을 자전거로 종주해보겠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허무맹랑한 포부로 사 놓았던, 그러고선 몇 번 타보지도 않은 접이식 미니벨로를 꺼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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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아닌 말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4. 9. 00:55
# 두 시간 정도 남아서 일을 하느라 퇴근이 늦어졌다. 계획을 세운다면 충분히 시간을 줄여서 할 수 있으련만, 계획을 그렇게 세워대는데도 그 계획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 남아서 일을 한다. 여하간 곧 어디에 처박혀 하루이틀 뒤면 찾지도 못할 그 계획들을 세우느라 저녁식사도 늦어졌다. 조금이라도 회사랑 거리를 두고 싶어서 전철에서 보내야 할 시간을 감수하고 아예 집 근처로 가서 밥을 먹는 게 낫겠다 싶었다. 혼자 따로 나와 살다보니 집근처에 나만의 단골가게를 넓혀나가는 재미도 있지만, 오늘은 그것도 귀찮아 라면에 밥으로 때우려고 라면가게에 자리를 잡았다. 바로 입구쪽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는 네 명의 남자 청소년 무리가 눈에 보인다. 기껏해야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나이다. 테이블 위에 그릇도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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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 printemps주제 없는 글/印 2020. 4. 6. 17:35
프랑스어 수업을 마치고 광화문으로 향하는 버스 안이었다. 오늘만큼 정신이 몽롱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오전 내내 머리에 맴도는 단어들도 문장으로 출력이 되지 않아 허탈했다. 한 주 내내 시달린 목디스크 때문인가보다. 기진맥진한 나머지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시선을 떨궜다. 초조하다. 왼편으로 한남대교 아래를 흐르는 한강이 보인다. 이윽고 저 멀리 보광동 언덕 위 새하얀 미나렛이 보인다. 맞아 저거였어, 투신하듯 버스에서 내린다. 하차한 버스 정류장은 벌써 4년도 더 전에 독일문화원을 다닐 때마다 이용한 버스정류장이다. 그 때는 이 때보다 더 이른 계절이었지. 그러니까 겨울이었지. 갑자기 예전의 기억이 되살아나 말끔한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 그래 맞아. Ach so, 독일의 정취를 느껴보겠다고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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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 문래(文來)주제 없는 글/印 2020. 2. 27. 00:10
지금은 아파트숲이 들어선 곳에 예전에는 커다란 방직(紡織)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문래(文來). 그래서일까 한자로 된 이곳 지명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산업화를 견인했던 어느 도구의 명칭—물레—과 발음이 똑같다. 부산 동래(東萊)의 '래(萊)'가 '명아주'라는 뜻을 담고 있는 데 비해, '오다'라는 의미의 행위 또는 추상적 개념을 나타내는 '래(來)'라는 글자는 이름에 섞이기에는 다소 거창한 느낌이고, 그래서 그런가 '물레'라는 이름을 한자로 차음(借音)했다는 어느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 설명을 문래역 7번 출구에서 멀지 않은 창작촌 입구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 지리에 익숙치 않은 나로서는—이곳에는 도시재생이 한창이던 2010년대 초반에 한 번 온 적이 있다—어마어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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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전(消耗戰)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0. 2. 14. 12:57
# 나는 그리 세련된 사람이 아닌지라 해야 할 말이 있으면 하는 편이다. 그런 나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겉보기와 다르다고도 한다. 오늘 같은 날이 그렇다. 작년 10월부터 계속해서 시달렸던 인건비성 경비 문제가 있다. 온갖 미스커뮤니케이션으로 점철된 이 업무—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조직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는 이를 주관하는 재무부서가 따로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경비 문의가 인사 업무를 보고 있는 내게 쇄도했다. 이때 제대로 짚고 넘어갔어야 했는데, 연말에 그렇지 않아도 다른 업무들이 쌓여 있어서 하나하나 따질 겨를이 없었다. 결국은 사달이 났다. 모두 무책임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이 이 인건비성 경비가 전사의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이다. 상대 회계팀은 시종일관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였고, 참다 못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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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s la rue : 사진일기 from Dec. '19주제 없는 글/印 2020. 2. 9. 02:30
원효대교를 지나 원효로를 따라 용산 상가를 가로질러 가는 길. 중학교 때 가끔 왔던 이곳은 지금은 오프라인 상거래 면에서 보자면 완전히 쇠락해 버렸다. 내가 사는 동네를 빼곤 서울은 하루가 다르게 모양을 달리 하는지라, 이곳 용산도 가히 상전벽해라 할 만큼 신수가 훤해졌지만, 주변의 건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으리으리한 건물들은 2020년대의 풍경이 반세기 이전과 딱히 어울릴 생각이 없음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 같다. 한 번은 미술을 공부하던 소개팅 상대가, 갤러리가 어느 동네에 몰려 있느냐에 따라 이른바 집값이 유망한 동네를 알 수 있다고 했었는데 용산이 바로 그렇다며 가벼운 농담조로 이야기를 했었다. 강남에 있던 갤러리들이 용산으로 속속 둥지를 틀고 있다며. 정말 가닥 없이 잡스런 생각이다. 실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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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달 사이(間月), 간월재주제 없는 글/印 2019. 11. 26. 00:03
간월(間月), 달과 달 사이. 내 마음대로 붙여본 이름이다^—^ 막상 간월재에 올라가면 표지판에 간월(肝月)이라는 이름으로 소개가 되어 있기는 한데, 간월(澗月, 달빛 시냇물), 간월(看月, 달을 바라보다) 등등으로도 읽힌다니 부르는 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거다. 영남알프스에 대한 로망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소소한 작명이라도 필요했으니, 주말을 이용해 1박 1일로 다녀온 곳은 영남 알프스, 그 중에서도 울주와 양산에 걸쳐 있는 간월산~신불산이라는 곳이다. 언젠가 영남(嶺南) 알프스라는 말을 귀에 접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아주 짤막한 영상에서 드론촬영—드론촬영은 걷는 이의 시야각과 전혀 다르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된 간월재의 풍경에 매료되어 무조건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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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균열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19. 10. 29. 22:08
# 내가 이토록 괴로운 것은 오로지 생각의 빈곤 때문이다. # 우리는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나머지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어쩌다 죽음에 대해 떠올릴 뿐이다. # 영화 속으로 도피해봐도 책 속으로 도피해봐도 그 어디서도 내 거처(居處)를 찾을 수 없다. # 살다보면 나란 사람을 뒤바꿔줄 깨달음 같은 것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연 당했을 때이든, 원하던 것을 쟁취하지 못했을 때이든, 가까운 사람과 갈등을 겪을 때이든, 내 안의 끝없는 결핍을 느낄 때이든,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릴 때마다. 어쩌면 그 어떤 깨달음을 얻기에는 내가 아직 있는 힘껏 삶에 부딪혀본 적이 없는지도 모르지만, 요새 그런 생각도 든다.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 군대 동기인 형이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