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없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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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s la rue : 사진일기 from Dec. '19주제 없는 글/印 2020. 2. 9. 02:30
원효대교를 지나 원효로를 따라 용산 상가를 가로질러 가는 길. 중학교 때 가끔 왔던 이곳은 지금은 오프라인 상거래 면에서 보자면 완전히 쇠락해 버렸다. 내가 사는 동네를 빼곤 서울은 하루가 다르게 모양을 달리 하는지라, 이곳 용산도 가히 상전벽해라 할 만큼 신수가 훤해졌지만, 주변의 건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으리으리한 건물들은 2020년대의 풍경이 반세기 이전과 딱히 어울릴 생각이 없음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 같다. 한 번은 미술을 공부하던 소개팅 상대가, 갤러리가 어느 동네에 몰려 있느냐에 따라 이른바 집값이 유망한 동네를 알 수 있다고 했었는데 용산이 바로 그렇다며 가벼운 농담조로 이야기를 했었다. 강남에 있던 갤러리들이 용산으로 속속 둥지를 틀고 있다며. 정말 가닥 없이 잡스런 생각이다. 실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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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달 사이(間月), 간월재주제 없는 글/印 2019. 11. 26. 00:03
간월(間月), 달과 달 사이. 내 마음대로 붙여본 이름이다^—^ 막상 간월재에 올라가면 표지판에 간월(肝月)이라는 이름으로 소개가 되어 있기는 한데, 간월(澗月, 달빛 시냇물), 간월(看月, 달을 바라보다) 등등으로도 읽힌다니 부르는 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거다. 영남알프스에 대한 로망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소소한 작명이라도 필요했으니, 주말을 이용해 1박 1일로 다녀온 곳은 영남 알프스, 그 중에서도 울주와 양산에 걸쳐 있는 간월산~신불산이라는 곳이다. 언젠가 영남(嶺南) 알프스라는 말을 귀에 접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아주 짤막한 영상에서 드론촬영—드론촬영은 걷는 이의 시야각과 전혀 다르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된 간월재의 풍경에 매료되어 무조건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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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균열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19. 10. 29. 22:08
# 내가 이토록 괴로운 것은 오로지 생각의 빈곤 때문이다. # 우리는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나머지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어쩌다 죽음에 대해 떠올릴 뿐이다. # 영화 속으로 도피해봐도 책 속으로 도피해봐도 그 어디서도 내 거처(居處)를 찾을 수 없다. # 살다보면 나란 사람을 뒤바꿔줄 깨달음 같은 것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연 당했을 때이든, 원하던 것을 쟁취하지 못했을 때이든, 가까운 사람과 갈등을 겪을 때이든, 내 안의 끝없는 결핍을 느낄 때이든, 어떤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릴 때마다. 어쩌면 그 어떤 깨달음을 얻기에는 내가 아직 있는 힘껏 삶에 부딪혀본 적이 없는지도 모르지만, 요새 그런 생각도 든다.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 군대 동기인 형이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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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ropos de moi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19. 10. 7. 22:10
# 어디가 출구인지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다 # 무기력한 날이다. 업무도 버겁고 채근하는 사람들도 거슬리기만 하다. 이런 날엔 일이 끝나도 사람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퇴근을 하면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듯, 몸이 옷이라면 이 무거운 육신을 잠시 개어두고 오로지 정신으로만, 정신 하나로만 편안하게 있고 싶다. 이대로는 끝없이 나태의 나락으로 빠질 것 같아 느닷없이 혼자 간 홍대앞. 길거리에서 작은 공연을 벌이고 있는 앳된 댄서들을 본다. 뭐라 해야할까, 줄곧 느른했던 마음이 스멀스멀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의 자아를 잠시 빌려 입어 보았다. 관객에게 스스럼 없이 다가가는 몸짓, 허공을 맴도는 시선, 이완과 긴장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동작, 당당함, 끼, 동료들과의 호흡..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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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전 : 忙 그리고 忘 사이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19. 8. 1. 00:56
# 은행업무를 보기 위해 한 시간 가까이 대기표를 뽑고 기다렸다. 업무마감 시각 10분 전 슬슬 초조해질 즈음 내 순번이 돌아왔다. 업무를 보며 짧은 대화가 오갔는데 직원이 말하길 내가 보려던 업무를 모바일로도 볼 수 있단다. 괜히 오래 기다리신 것 같다길래, 한 술 더 떠 이 업무를 보려고 반차까지 냈다고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가 요새 행원을 줄이고 있다는 직원의 얘기까지 이어졌다. 그 덕에 유달리 손님이 많은 이곳 지점에서는 대기시간이 155분까지 기록한 적까지 있다고. 아닌 게 아니라 얼마전 집 앞의 은행 지점이 문을 닫았다. 은행업무 스마트화의 일환이란다. 사실 요새 대부분의 업무를 모바일로 보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은행에 갈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모든 것에 효율화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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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가 되다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19. 5. 16. 23:13
#난잡하기만 했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웬 꿈틀대는 생명체가 눈에 들어왔다. 새에게 불의의 일격이라도 당한 것일까. 얼음처럼 언 상태로 앞으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쥐 한 마리가 눈에 띈 것이다. 대낮에 쥐를 보는 것도 쉽지 않은데 게다가 앞발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심상찮은 쥐라니. 옆에는 까치 한 마리가 시커먼 눈을 부릅뜬 채 우악스럽게 부리를 들이밀고 있다. 나는 기쁜 소식을 가져다준다는 이 텃새가 언제부턴가 참 싫다. 잠시 어떡하나 망설이다가 도시 한복판이라고는 하나 자연의 순리에 맡겨야 하지 않겠나 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약 반시간 후 군대동기의 결혼식에 들르기 위해 이번에는 정장차림으로 갈아입고 같은 길을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아까의 광경이 떠올라 주차된 차에 가려진 예의 장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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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와 덤불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18. 10. 23. 23:26
# 문득 떠오른다. 대학교 2학년 때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회색인간이야. 헤르만 헤세의 책에 빠져 그의 작품에 대해 얘기하던 중이었다. 뜬금없이 회색인간? 너는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고 강건너 불구경하는 거 좋아하는 타입이거든. 결코 무엇도 하지 않지. 그게 그 친구와의 마지막 대화였던 것 같다. 간사이 여행도 함께 할 만큼 믿음이 갔던 친구가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간 뒤로, 친구와 제대로 나눈 마지막 대화는 아직도 종종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이후 5년 뒤인가 우연히 영화관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그 친구를 마주했을 때 나는 짤막한 인사만을 남기곤 황급히 갈길을 재촉했었다. 그때는 아무런 예고없이 수년간 친교(親交)를 끊어버린 그 친구에 대한 서운함이 우연히 찾아온 반가움을 반사적으로 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