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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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Passion simple)일상/book 2023. 4. 22. 10:52
나는 이 관능적인 소설이 말하는 “단순한 열정”은 "기다림(Attente)"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이 "기다림"에 두 가지 행위를 빗댄다. 첫 번째는 소설 속 화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며 경험하는 "기다림"이고, 두 번째는 글을 쓰며 소환되거나 소거되는 감각으로써 "기다림"이다. 어느 행위이든간에 소설 속 "기다림"이라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기다림은 실체다. 몸에 각인된 것이고 뇌리에 뿌리박힌 것이다. 작가에게 그 남자를 기다리는 것은 멈출 수 없는 것,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자신도 멈추는 법을 모르겠다고. («Je ne sais pas si je m’arrêterais.»—p.18) 마치 고삐 풀린 것처럼 그녀는 그 남자에 대한 기다림을 멈추지 못하고, 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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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용법(La vie mode d'emploi)일상/book 2021. 12. 13. 02:26
세 번째 조르주 페렉의 소설이다. 『사물들』,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이어서 『인생사용법』. 배송된 책을 받아보고 나서야 이 책이 꽤나 두껍다는 것을 알았다. 앞의 두 책은 단편소설이었기 때문에 『인생사용법』도 그 정도 길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다. 책이 생각보다 커서 주문서를 다시 확인해보니 두께만큼 가격이 제법 나간다. 여러 책들을 함께 주문하다보니 가격이며 규격정보를 제대로 체크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읽고 싶었던 책이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은 부차적이기는 해도, 이 두께에 내용이 매우 난해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책의 말미에 작품 해설에서 언급되기는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에피소드는 매우 지엽적인 사물들이나 미시적인 대상들에 천착하고 있다. 가령 매 에피소드의 서두마다 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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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Une vie)일상/book 2019. 11. 25. 22:14
연남동에는 번화가로부터 아주 살짝 빗겨난 골목에 이라는 카페가 있다. 하루는 일이 끝나고 머리도 식힐겸 홍대 일대를 정처없이 걸어다니며 군상(群像)을 바라보다—나의 주특기다=_=—바로 이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 메뉴보다도 밀크티가 간판인 집이어서 유리용기에 담긴 밀크티 한 잔을 먹었었는데, 정작 이 카페에서 읽었던 책이 카프카의 단편집이었다. 이 카페는 어쩌다 모파상을 모티브로 이름을 짓게 되었을까 떠올려보다가 내가 모파상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들어보기만 했지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리고 그날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곧장 인터넷으로 이 책을 주문했다!! 막상 이 책을 집어들기까지는 또 시간이 걸렸지만, 막상 손에 쥐어지고 나니 소설답게 술술 읽힌다. 원제 《Une vie》. 삶 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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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걸작일상/book 2019. 10. 3. 00:03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으레 변명이 그러하듯 일상을 보내다보면 관심가던 것들이 바뀌고 흥미를 끌던 것들도 흐트러진다. 그런 까닭에 오노레 드 발자크의 글은 나의 변덕스러움 속에서 외면받아 왔었던 것이다. 이 얇은 책에는 짧지만 강렬한 두 편의 글―과 ―이 실려 있다. 퇴근길을 할애해가며 책을 후루룩 읽었다. 이 두 편에 등장하는 주인공―돈 후안과 프렌호퍼―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의심'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삶을 관조(觀照)하고 부유(浮遊)하는 돈 후안이나, 실재(實在)에 다가가기 위해 선 하나 면 하나에 번민을 거듭하는 프렌호퍼, 둘 모두 끝없는 회의(懷疑) 끝에 일종의 자기 부정(否定)에 이르는 인물들이다. '질레트'(즉 재현의 대상)와 '카트린 레스코'(즉 표현의 대상)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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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단편소설 두 편일상/book 2018. 11. 19. 00:19
투쟁 영역의 확장/미셸 우엘벡/열린책들 저물녘 맹수들의 싸움/앙리프레데리크 블랑/열린책들 내가 본 것들을 쓰지 않는다면 나는 그만큼,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나는 다만 조금 더 고통스러울 것임을 강조하고 싶다. 왜냐하면 글쓰기가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일을 되새기게 하고, 그 성격을 규정할 뿐이다. 그것은 일관성이 있는지, 사실적인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우리는 여전히 핏빛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지만, 거기에는 어떤 좌표들이 있다. 불과 몇 미터 앞에 혼란이 있다. 독서의 절대적이고 기적적인 힘과는 얼마나 대조되는가! 평생 읽기만 하면 소원이 이루어질까? ···세상이라는 구조물은 고통스럽고 불충분하다. 그것은 변경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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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I일상/book 2018. 2. 11. 23:15
인과관계란 가능한 거의 모든 결과를 만들어 내며, 따라서 우리가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도 만들어 낸다. 이 작업은 우리 욕망이나 삶 자체로 인해 더욱 느리게 진행되어 우리 욕망이나 삶이 멈추었을 때 비로소 실현된다.―p. 86 변하지 않을 내 취미와 내 삶을 행복하게 해 줄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아버지는 두 가지 무서운 의혹을 내 마음속에 심어 넣으셨다. 첫 번째는 (매일 나는 아직 속도 대지 않은 삶의 문턱에 있으며 내 삶은 다음 날 아침에야 시작되리라고 생각해 왔는데) 내 삶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게다가 뒤이어 올 삶도 지나온 삶과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는 의혹이었다. 두 번째는 사실을 말하자면 첫 번째 의혹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시간' 밖에 있지 않고 소설 속 인물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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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심농 추리소설집일상/book 2016. 11. 18. 22:50
부산 여행 중 심심풀이 땅콩으로 읽었던 조르주 심농(Georges Simenon)의 단편집. 대-박이었다. 네 편의 에피소드 모두 재미있게 읽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와 였다.옮긴이(임호경 譯)는 국내에서 "조르주 심농"이라는 작가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 하는데, 실제로 프랑스어 문학계(작가는 벨기에 출신이다)에서는 쥘 베른과 알렉상드르 뒤마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번역/출간된 책이 조르주 심농의 작품이란다. 달리 말해, 빅토르 위고, 알베르트 카뮈, 생텍쥐베리, 스탕달 같은 기라성 같은 프랑스 작가들보다도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는 소설이라는 것. 과연 읽는 동안 나도 책을 손에서 놓기가 어려웠다. 추리소설인지라 느낀 점을 따로 남기는 대신, 책의 끝에 실린 옮긴이의 서평 가운데 '매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