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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의 일기: 몽마르트Vᵉ arrondissement de Paris/Janvier 2022. 1. 22. 19:59
# 파리의 겨울밤은 길기 때문에 따로 창문의 블라인드를 칠 필요가 없다. 이곳에 도착한 뒤로 늘 일찍 잠이 들었다가 어제는 자정이 되어 잠을 청했다. 그래도 새벽 여섯 시 경이 되니 몸에 벤 리듬대로 눈이 떠졌다. (물론 그리곤 다시 잠들었다.) 새벽 여섯 시쯤 창문밖을 바라보면 새벽 하늘이 보인다. 낡은 식탁보를 레드와인이 적신 것처럼 잿빛과 진분홍이 오묘하게 섞인 빛깔이다. 아직 완전히 밝아지지 않은 하늘을 보면서 오늘 날씨는 어떨지 생각해 보았다.
# 주말이 되면 식사를 해결하는 문제가 아직까지 난감하다. 무프타흐 시장에서 간단히 팬케이크와 카푸치노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 왔다. 교내에 코로나 확진자가 많이 나오고 있는 관계로 토요일인 오늘 오후 5시에 도서관을 닫는다는 안내가 되어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주말이어서 그런지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다. 조용히 책을 읽을 생각이다.
#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읽은 뒤 늦은 오후에는 몽마르트 언덕에 다녀왔다. 사는 곳에서 더 가까워 보이는 생 마르틴 지역을 갈 지 고민하다가, 그 동안 너무 가까운 다녔던 것 같아 북부에 위치한 몽마르트에 다녀오기로 했다. (아마 이동하는 데 드는 물리적인 시간에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가는 방법은 다양한데 노트르담 데 셩(Notre-Dame des Champs) 역에서 4호선을 타고 아베스(Abbesses) 역으로 가면 되었다. 그러고보니 RER나 버스는 이용해봤어도 메트로는 처음 타보았다. 12호선은 우리나라로 치면 경전철 쯤 되는 소형 전철로 역사(驛舍) 또한 아담하고 아기자기했다.
오늘도 날씨는 좋지 않아서 저번에 퐁피두 센터를 갈 때처럼 카메라를 챙기지는 않았다. 아무 짐도 챙기지 않고 단출한 차림새로 왔는데 그러길 잘 했다 싶다. 지하철이나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있다보면 아무래도 가지고 있는 짐에 신경이 쓰이는 데다 사진도 잘 나오질 않는다.
아베스 역을 빠져나와서는 론리 플래닛에서 추천하는 길을 따라서 걸어보기로 했다. 사실 아베스 역과 아주 짧은 거리에 있는 피걀(Pigalle) 역에서 아베스 역에서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 내렸는데, 이곳이 모임을 가질 만한 곳이 더 많은 모양이다. 또 피걀 역에서 내리면 물랑 루쥬(Moulin Rouge)를 둘러보기도 더 수월하다. 나는 이 점을 미리 확인해두지는 못해서 아베스 역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아베스 역에서는 우선 사랑해 벽(Le Mur des je t’aime)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꽤 모여 있다. 파리 시내 어딜 가나 코로나가 무색하게 인파가 많기는 하지만, 퐁피두 센터를 갔을 때에도 관광객이 많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는데 이곳 몽마르트 일대에는 한눈에 봐도 관광객이 많았다. 스페인어나 이탈리아어가 많이 들리기도 했고 커다란 그룹을 이뤄 움직이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특히 나중에 사크레쾨르(Sacré-cœur) 대성당에 갔을 때에는 사람도 많고 불량배들도 한창 성업 중이어서, 팬데믹이 아니었다면 사람에 치여 아무것도 못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프랑스 경제에서 관광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다보니 정부로서도 경기를 살리려고 통제를 느슨하게 하는 것 같다.
몽마르트 ‘언덕’이라고는 하지만 평지대인 파리에서 보기 드문 언덕일 뿐, 한국의 경사진 곳들보다는 훨씬 완만하고 길도 잘 되어 있다. 또 곳곳에 명소가 숨어 있으면서도 사람이 사는 주택가이기도 해서 이곳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도 있다. 몇몇 관광객들은 근대식 소형차량을 렌트한 모양으로 유쾌한 표정으로 몽마르트를 쏘다닌다.
생 드니(Saint-Denis) 동상이 서 있는 곳처럼 그냥 현지 사람들이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들도 있지만, 대부분 명소들은 관광객이 많아서 점점 피로해졌다. 그래도 몽마르트 일대를 도보로 한 시간 반 정도 쭉 둘러본 뒤 바뇨(Baneaux) 역을 통해서 4호선을 타고 샤틀레-레 알 역에서 RER로 환승한 뒤 기숙사로 되돌아왔다. 내일은 최대한 기숙사 인근에 머물러야겠다.
# 얼마 전 프랑스어 수업에서 '프랑스어 문법은 섹시하다'는 텍스트를 다뤘는데, 텍스트에는 프랑스어가 라틴족, 골족, 파리시족, 훈족 등의 영향을 고루 받았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런 맥락에서 섹시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몽마르트'의 어원으로 '마르스의 산(le mont de Mars)' 또는 '순교자의 산(le mont des Martyrs)'로 소개되고 있다. 몽마르트는 그러한 이름만큼이나 19세기 말 파리 코뮌의 전쟁터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봄 즈음에 이곳을 다시 방문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이곳에 얽힌 이야기를 좀 더 알아둬야겠다.
# 프랑스에 와서 좋았던 점: 보행자가 마음 편히 다닐 수 있다는 점, 자전거를 타기 좋은 환경, 반려동물을 키우기 좋은 환경(은행이나 백화점에도 데리고 들어온다), 사람들이 대화를 즐기는 모습(굉장히 진중하고 열심히 대화하는데 때로 대화가 너무 길어지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다양한 종류의 서점이 많은 길거리(고서점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고 센느 강변에 늘어선 가판대들도 죄다 서점상들이다.. 텍스트에 대한 수요가 많은 듯하다), 오래된 것들을 가꾸고 지키려는 노력(엄청 오래된 가로등에 가스등 대신 LED등을 넣어서라도 본체를 유지한다)
# 프랑스에 와서 불편한 점: 종잡을 수 없는 행정절차(…여기 와서 쓴 메일만 보관함에 몇 통인지 셀 수가 없다, 이건 정말 심각하다), 가끔 보이는 무질서(샤틀레-레 알 역에서 내가 태깅하는 걸 기다렸다가 무임승차하는 사람들 + 길거리에 반려동물 배설물 안 치우는 사람들), 인종 차별, 비싼 서비스 물가(1인당 GDP가 프랑스가 월등이 높은 것도 아닌데 아마 자국민의 복지 혜택이 많아서일까? ...파리에 머무르며 짧은 기간 관찰한 바 이곳 사람들은 노동강도에 비해 소비 여력이 커보여서 연구 대상이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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